미리 남기는 유서
퇴근길이었어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덜컹하고 멈추지 뭐예요. 어어 하며 앞으로 쏠렸는데, 다행히 손잡이를 잡고 버텼어요. 뒤에서 한 사람만 넘어졌어도,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어요. 갈 때는 순서 없다더니, 인사도 없이 떠날 뻔했어요. 근데 말없이 가버리면 너무 미안하니까 미리 글이라도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22년 마지막 날에 글을 올리고 싶었는데, 글을 다듬다 보니 벌써 하루가 지나 2023년이 되었네요. 하루 더 무사히 살아남아 글을 쓰게 되는 것도 감사한 일이에요.
내 생의 마지막 글이니까, 다른 사람은 그만 신경 쓰고 나를 위한 글을 쓰고 싶어요. 누가 볼 걱정을 하지 않는 일기처럼요. 마음 가는 대로 신나게 쓰려다가, 문득 스치는 생각에 멈칫해요. 나의 마지막을 배웅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유서는 남길 필요가 없네요. 유서는 결국 내가 보기 위한 글이 아니었군요. 남길 글을 남은 사람들을 고려하며 쓰는 걸, 마지막 책임이라고 생각해야겠어요. 그래도 끝까지 책임질 사람들이 있다는 건, 내가 잘 살아왔다는 증거라고 생각할래요.
어린아이 같은 삶이었어요.
나는 성장하고 있었어요.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급속도로 사회화되죠. 저는 성인이 된 후에야 스스로 발전하며 변해가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햇수로 따지면 아직 초등학생인 느낌이네요. 발전의 즐거움을 한창 누리던 중에 이렇게 가게 되어서 아쉽긴 해요.
순수하고 싶었어요. 저에게는 세상의 선악과 갈등, 인간의 태생적인 모순과 딜레마가 너무나 뚜렷하게 인식되어 고통스러웠어요. 그래서 더더욱 덕목과 가치에 집중했어요. 아직 그 사람에게 남아있을 순수의 조각을 찾고, 먼저 신뢰를 주고, 진심이 통할 거라 기대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사랑하려 노력했어요. 적어도 내가 속한 곳은 안전하고 온전하길 원했어요. 안될 거란 걸 알지만, 그렇게 아이처럼 소망했어요.
사랑받고 싶었어요.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자라고 싶고 노력했는데, 아직은 사랑을 받는 게 더 좋네요. 부족한 저의 사랑을 채워주는 사람들과 함께해서 행복했어요. 나의 든든한 가족과 친구들. 제가 없더라도 항상 사랑받고, 사랑 주는 삶에서 행복하길 바라요.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왜 웃고 화를 내는지, 왜 슬퍼하고 고통받는지. 내가 느낌 감정이 진실한지, 어디서 비롯됐는지 항상 고민해요. 감정이 먼저 앞서고 이해는 뒤쳐지네요. 나름 나의 마음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글을 쓰며 드는 묘한 마음조차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나'라는 고난도의 수수께끼가 있어 심심하진 않았네요.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렀어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두서없이 뱉어내고, 제대로 듣지도 않아 기억도 잘 못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에 심취하여 정신없이 말하다가 뒤늦게 눈치도 보고, 유머감각도 부족해 진지한 얘기만 해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서툴러 공감도 잘 못해요. 어른이 되려면 멀었나 봐요.
여러분이 알고 있던 저의 모습과 같은가요? 다르더라도 좋게 기억해 줘요. 저랑 함께한 시간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작별 인사
한 명을 정해서 쓰진 않을래요. 각자와 얽어낸 이야기들은 다르지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같으니까요. 그리고 혹시나 빠뜨린 사람이 생긴다면 미안하니까요!
감사해요. 다사다난했던 올해는 주변의 소중함을 정말 많이 느낀 시기였어요. 힘들 때 곁에 있어준 여러분을 통해 많이 위로받았고요. 내가 힘들기 전에도 감사하며 살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요.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신 나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가까이하며 힘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해요. 너무 고맙고 감사한 게 많아서 하나하나 적기도 힘들어요. 여러분들도 그동안 저를 통해 힘을 얻으셨다면 좋겠어요.
마음껏 슬퍼해주세요. 충분히 통곡하고 눈물을 짜내주세요. 그렇게 속에서 저를 비워내시고, 훌훌 털고 일어나 자신의 삶을 사시길 바라요. 제가 여러분에게 마음의 짐과 한으로 남아 두고두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아요. 화기애애한 모임이나 즐거운 술자리에서 저의 웃긴 이야기만 꺼내주세요. 저를 떠올렸을 때 슬픔보다 즐거움이 남도록 마음껏 슬퍼해주세요.
보고 싶을 거예요. 천국이니 윤회니 알 수 없지만, 떠나고 나서도 내가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다면 그리울 거예요. 밤늦게 기차를 타고 글을 쓰는 지금도 보고 싶어요. 밤의 검은 창문에서 그리운 사람들이 아른거리네요.
저는 집을 나설 때 항상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잖아요? 친구들에게는 '다음에 봐'라고 말하고요. 그런데 이제 다음이 없네요.
안녕히 계세요.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