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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닭 Nov 19. 2022

'나', 여행

행여, '나'가 매몰되지 않게.

  "옷 입어 가자"

  "?? 어디를요??"

  "저어기 낙동강에 유채꽃 축제한다더라. 빨리 옷 입어"

  "아아아아아ㅏㅏㅏㅏ아니왜미리말도안해주고갑자기가자는거예요그리고가봤자사람만득실득실많고이리처이고저리치이고하며할텐데차라리집에서쉬는게낫죠원래밖에나가기좋은날이집에있기도좋은날인데이런좋은날씨에굳이굳이밖에나가야겠어요?"

  "(절레절레)"





선천적 지박령



  나는 선천적인 지박령(특정한 장소에 얽매인 귀신)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점차 커가며 부모님께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취미와 재미는 집 안에서 다 누릴 수 있었기에,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족 여행을 가려할 때마다 내가 짜증을 냈기 때문에, 부모님은 점차 가족 여행을 줄여나가거나, 따로 부부여행을 다녀오셨다. 지금 이렇게 적고 있으니 마치 가족의 분열이 일어나는 굉장히 슬픈 이야기 같지만, 그 당시 나는 만족했다.

  몇 개 안 되는 취미라고 해봤자 독서와 게임이 전부였다. 천장을 보고 누웠다가 베개를 턱에 끼고 엎드렸다가, 손목이 아프면 옆으로 눕고 팔이 저리면 반대로 누웠다. 혼자 으히히 거리며 뒹굴거리다 가끔은 오오 하며 몰입하고, 로맨스로 가슴이 간질거릴 때는 이불을 마구 긁기도 한다. 독서가 질릴 쯤에는 주섬주섬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한다. 강렬한 자극에 몸을 맡기는 것은 아니다. 지친 몸에 마사지를 하듯, 주중의 일로 피로한 정신에 마사지를 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각적 자극 속에서 멍 때리며 말이다. 그러다 보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공부로 가득 찬 평일이 시작되었다. 이런 나만의 루틴 속에 여행이 끼어들어올 틈은 없었다.

  이처럼, 나는 오래도록 여행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이 서로의 여행 장소를 묻고, 해외여행과 국내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한 발 뒤로 물러나 그렇구나 하며 맞장구치기만 했다. 내 눈에는 사람들이 여행을 하며 보고 느끼는 것들이 본질적으로 다 비슷해 보였다. 어쨌거나 여행지란 건 자연경관, 건축양식, 사람들, 음식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조금씩 달랐을 뿐이다. 인터넷에서 사진으로 보면 되지 돈과 시간을 써가며 보러 갈 필요가 뭐가 있는가.






저, 떠나요



저 오늘 떠나요 공항으로
핸드폰 꺼 놔요 제발 날 찾진 말아줘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도 어쩔 수 없어 나
가볍게 손을 흔들며 bye-bye
쉬지 않고 빛났던 꿈같은 my youth
이리저리 치이고 또 망가질 때쯤
지쳤어, 나 미쳤어, 나 떠날 거야, 다 비켜
I fly away

- 볼빨간 사춘기, <여행>

   볼빨간 사춘기의 노래, <여행>은 답답한 일상을 박차고 떠나 여행을 시작하는 설렘을 담고 있다. 위 글에서 적은 나라면, 절대로 이 노래의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치고 힘들면 집에서 쉬어야지 왜 밖을 나가는가? 다행히 이런 짧은 경험으로 비롯된 편견은, 내가 여러 경험을 하고 정신적으로 커가면서 변하게 되었다.



자연적인 경관



  고등학교 때, 우연한 기회로 학교 차원에서 중국 여행을 가게 되었다. 타지의 낯선 음식에 물려갈 즘, 황산(黃山)에서 케이블카를 타게 되었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경관이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안개가 자욱하여 산의 높은 봉우리만 드문드문 보였는데, 교과서에서 보던 산수화 같은 산이 굽이치며 내 발아래로 펼쳐지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나는 감탄하며 빠져들었다. 중국제 케이블카에 대한 불신으로 심장이 강하게 뛰고 있었기 때문에 흔들 다리 효과로 착각한 걸까?

  케이블카가 정상에 도착한 후에도 신기한 경관은 이어졌다. 안개는 내 발걸음에 흩어질 정도로 낮게 흩뿌려져 있어 구름 위에 올라온 듯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바위 사이사이에 원숭이들이 있어 관광객들과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과자를 줄 듯 말 듯 애태우는 관광객들과, 점차 화가 차오르는 원숭이를 보는 것도 어이없이 웃겼다.

  사실 무엇보다 이 중국 여행이 나에게 남긴 것은, 멋진 경관 그 자체보다 나에게 여행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남겼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보다 감정에서 비롯된 감상을 더 오래 기억하기 때문에, 이 일을 계기로 점점 여행에 대한 좋은 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나는 점차 여행에 대한 로망을 품게 되었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에게는 '우와'하며, 내가 느끼지 못했을 무언가를 느꼈을 거라고 되레 짐작하며 부러워했다. 또한 여러 문학과 매체는, 여행을 '일상을 씻어내는' 특효약으로 그려내곤 했기에 나도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어졌다.

  강의가 끝나고, 무엇하나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가장 먼저 오는 버스를 탔다. 휴대폰은 잠시 덮어두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나에게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자 낯선 길과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점차 줄어들었고, 평지를 달리던 버스는 오르락내리락하길 반복했다. 해가 나에게 작별인사를 할 즘, 버스는 어느 고속도로 진입 지점에서 멈췄다.


 "학생~ 안 내려?"

 "아 넵 감사합니다"


  나는 아무도 오지 않는 버스 정류장 의자에 멍하니 앉았다. 으레 사람들이 말하던 후련함과 상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나는 뭘 해야 하지? 내심 기대했던, 드라마처럼 우연한 인연과의 만남은 없었다. 사람이 있어야 만남이 있지 않겠는가? 아, 드라마 같은 순간이 찾아오긴 했다. 사람 대신 비가 찾아온 것이다.

 

  쏴 ---


  약간의 공황상태에 빠진 채, 나는 돌아갈 길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버스 안내 전광판도 없는 외진 곳이었기에, 다음 버스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며, 다음에 올 버스가 어디로 갈지도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을 켜고 지도 어플을 실행했다. 도착지를 찍고 길 찾기를 검색하니 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졌다. 배터리가 5%로 진입한 것이다. 황급히 화면을 캡처하고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 걸어오다 도움을 요청해 버스를 탔을 수도 있겠지만, 쓸데없는 오기로 비를 맞으며 걸어 돌아왔다.

  이 일탈을 빙자한 여행은, '여행'에 대한 환상을 깨뜨렸다. 그러고는 여행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여행을 하고 싶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내가 원해서 떠난 여행에 왜 부족함을 느꼈을까?

  


그건 좀 아닌데요?



  내가 여행에 대해 더욱 깊게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학과 교수님과의 대화에서였다. 교수님은 해외여행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계셨고, 해외여행으로 강의를 불참한 학생에게 F학점을 매기는걸 자랑스러워하셨다. 해외여행을 가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건 국내여행에서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에, 해외여행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헛바람이 든 것이라 생각하셨다. 나는 일정 부분은 동의하면서도, 여행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왔기에 적극 반대 의견을 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누군가가 해외여행을 가서야 겨우 깨달을 것들을, 동네를 걸어 다니며 깨달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람이 자극에 따른 반응을 한다면, 다른 자극에는 다른 반응이 나오기 쉬울 것이다.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깨달음을 주기 쉬울 테고. 나는 교수님의 의견에 반박하면서, 더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  



여행의 의미



  여행의 의미를 생각한 지 여러 시간이 흘렀다. 나는 자존감 키우기의 일환으로 혼자 에버랜드에 방문했다. 남들과 할 수 있는 건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놀이기구 하나에 2시간을 넘게 기다리고, 또다시 부족해진 휴대폰 배터리와 씨름하며 익숙한 감정을 느꼈다.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이전에, 버스 여행을 떠나며 느낀 마음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에겐 이제 마음을 나눌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로스트 벨리(동물원)에서 찍은 사진을 보냈다.


  ...

  나 : (사진)

  나 : 미어캣 귀여워

  친구 1 : 누구랑 갔냐

  친구 2 : 혼자다 쟤 딱 봐도

  친구 1 : 근데 니는 혼자 다니는게 더 좋아? 왜 우리보고 같이 가자는 소리도 안해?

 

  여기서 나는 멈칫했다. 친구 1의 질문은, 내가 느껴오던 여행에 대한 뭔지 모를 부족함을 건드리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의 톡을 받고서야 내 생각을 정리해 표현할 수 있었다.


  나 : 혼자가 편하긴 한데 재밌기는 같이가 더 재밌었을듯

  친구 2 : 그건 글치

  친구 2 : ("미어캣 귀여워"에 대한 답장) 나는?

  친구 1 : 당연하지 닌 후회할것이다 우리랑 함께가지 못한것에 대해서

  나 : ("나는"에 대한 답장) (놀리는말)

  친구 2 : 뒤지고싶나

  친구 3 : 아 이제 다읽음

 

  친구들과의 짧은 대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건, 나는 어떤 외로움과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여행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정말로 필요한 건 여행 그 자체가 아니라 내 마음속 결핍을 인지하는 게 먼저였는데도 말이다. 문제의 원인을 모르고, 내가 만든 여행에 대한 과도한 환상과 싸우고 있으니 여행을 즐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행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다.






여행의 맛



  이제는 여행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여행'이라는 수단에 집착하지 않고도 나를 채울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알게 되었다. 나아가, 다른 수단에선 느낄 수 없는 '여행'의 맛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달라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하는 것도 재밌고, 새로운 대화 소재로 이야기가 풍부해지며, 낯선 것을 대하는 설렘이 함께했다. 정말로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훌쩍 떠날 것이고, 함께하는 즐거움이 필요하다면 친구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도 좋을 것이다.

  글을 적으며 내가 다닌 여행을 정리하다 보니, 나는 주로 혼자 다닌 여행에서 느낀 점이 많았다. 함께하는 것은 큰 책임감이 필요하기에, 예전의 나에겐 크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 여행은 함께 떠나고 싶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지금 내가 헤쳐나가는 삶이 '여행'같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누구와 함께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 나는, 동행을 요청할 정도의 용기는 가지게 되었다. 좀 더 성장한 나는 어떤 여행을 해나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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