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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닭 Dec 04. 2022

쉼표

휴식을 할 지점

쉼, 휴식


  말을 하다 보면, 다시 음미하고 싶을 정도로 어감이 좋은 단어들이 있다. 나에겐 '쉼'과 '휴식'이란 말이 감미롭다. '쉼'은 힘 빠진 한숨 소리와 닮아 있다. 팽팽했던 풍선의 바람이 완전히 빠지기 직전에, 공기가 새어 나오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입을 벌릴 힘도 없을 때, 앞니 사이로 스쳐 나오는 안도의 한숨이다. '쉬임'이라 말하기도 힘들어 '쉼'이라니. 얼마나 일이 고되었을까? 그러나 고될수록 다가올 휴식이 더 달콤한 걸 알기에 '쉼'이란 단어가 좋다.

  '휴식'도 마찬가지다. '휴'는 발음만 하더라도 절로 긴장을 풀어준다. '식'은 짧은 발음으로 닫히는 발음이라 또 반갑다. 괴로웠던 하루가 끝났으니, 이젠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라는 그림이 연상된다. '휴'로 긴장을 풀고, '식'으로 깔끔한 마무리를 지어주기에 '휴식'이란 단어가 좋다.

  나는 성장하며 나에게 맞는 '쉼'과 '휴식'은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글쓰기'도 나의 휴식법 중 하나이므로, 마음 편하게 나의 휴식에 대해서 정리해본다.






휴식이 필요하지 않던 시절

 


  코찔찔이자 유치원생이었던 나는 매일이 즐거웠던 듯하다. 힘든 일은 생각나지 않고, 즐거웠던 일 한 가지만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당시 유치원에는 기묘한 유행이 돌고 있었다. 유치원에는 마당이 딸려 있었는데,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아이들은 흙을 열심히 뭉치곤 했다. 흙을 뭉치는 게 무슨 특별한 일인가 하겠지만, 점점 흙을 뭉치는 아이들이 전염병처럼 늘어나더니, 대다수의 아이들이 이 요상한 활동에 참여했다. 쉴 새 없이 손으로 흙을 조물락거리던 아이들은 점차 전문가가 되기 시작했다. 흙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햇빛에 잘 마른 퍼석한 흙은 뭉치기에 좋지 않았다. 부스러지는 모래를 들고 끙끙대던 아이들은, 마당 구석, 팔각 정자 아래의 그늘에서 짙은 고동색 흙을 보게 된다. 손가락 사이로 촉촉하고 쫀득하게 파고드는 고동색 흙은 아이들을 열광시켰다. 단 한 번의 쥠으로도, 고스란히 손자국을 남기며 경단으로 빚어진 흙. 틀림없는 명품이었다. 넓은 마당을 뒤로하고 정자 주변에 둥글게 앉아 바닥을 파헤치는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보기에 분명 기괴했으리라. 아이들은 무수한 흙 경단을 만들어 정자 아래에 숨겨두었고, 최대한 빠르게 점심을 먹은 뒤 정자로 돌아가 자신의 경단이 무사한지 확인하곤 했다. 자신의 흙 경단이 없어졌으면 울상을 지으며 다시 흙을 뭉쳤고, 다음날에도 경단을 만들 생각에 벅차곤 했다.

   으레 아이들의 유행이 그렇듯, 자연스럽게 다른 유행이 뒤를 이었지만, 이 시절의 나는 놀이로 즐거웠다. 휴식에 반대되는 '일'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이 행복했다. 또한 이때의 나는, 스스로 타오르는 태양처럼, 샘솟는 에너지로 별다른 휴식 없이도 충만했다.



나를 비우는 휴식



  초등학생이 된 나는 책에 빠져 살게 된다. 평소처럼 도서관 구석구석을 살피던 나는 표지가 굉장히 멋진 책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산 판타지 소설이었다. 아마 선생님용 도서로 준비된 듯,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꽤나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그러나 나는 교과서를 벗어난 환상 속 이야기를 접하며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때부터 나의 판타지 소설 사랑이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 접한 이 판타지 소설은, 분야에서 명작으로 평가받는 도서였다. 그러나 그 외 대부분의 한국산 판타지 소설은 '양산형 판타지 소설(양판소)'혹은 '불쏘시개'라고 불릴 정도로 문학적 가치가 떨어졌다. 양판소는 페이지의 단어 몇 개만 읽고 넘겨도 내용이 이해가 될 정도라, 하루에 2~3권을 읽어도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수준 낮은 글을 읽는다고 해서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판타지 소설 읽기는 나의 새로운 휴식 방법이 되었다. 시작은 환상 속 이야기가 주는 자극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멍 때리며 정신을 비울 수 있는 취미가 된 것이다. 집중하지 않아도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등으로 정보를 훑듯이 즐기는 것처럼 말이다.

  기질적으로 생각이 너무 많은 나는, 본능적으로 나를 비우는 휴식 방법들을 더 찾게 되었다. 게임도 이 중 하나다. 내가 컴퓨터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으면 부모님께서는 "재밌냐"라고 물어보셨는데, 나는 "아니요"라 고 늘 답했다. 그러면 부모님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지나가셨는데, 굳이 설명을 드리진 않았다. 나는 재미가 아니라 멍을 때리기 위해 컴퓨터에 앉아 있었고, 나의 휴식을 설명으로 깨뜨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각종 신체활동도 나를 비우는 휴식의 한 방법이다. 스포츠 같은 경쟁활동은 멀리하지만, 최선의 동작을 수행하기 위해 내 몸을 움직이는 활동들은 즐거웠다. 러닝, 수영, 요가, 플라잉 요가, 기계체조, 클라이밍, 헬스, 폴댄스 등. 한 가지를 꾸준히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내 몸에 집중하며 생각을 지워나갔다. 동작이 어려울수록 잡념을 지우는 효과도 뛰어났고,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 또한 나를 비우는데 도움을 줬다.

  한없이 늘어지는 것도 달콤하다. 내가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단 것조차 잊고 싶을 정도로 귀찮을 때, 침대에 딱 달라붙는다. 어설피 깨어났어도, 시간을 힐끗 확인한 후 눈을 감는다. 맨살이 이불을 스칠 때 발생하는 열이 소소한 행복을 준다. 몸이 이끄는 대로 여러 방향으로 누웠다가, 불편해서 다시 깬다. 휴일에만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다.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은 불안감이 들 때쯤 주섬주섬 일어나 벽에 기대어 앉는다. '으브브'소리를 내며 휴대폰을 확인한다. 오늘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 생각해본다.

  나의 하루가 바쁠수록, 나를 비우는 휴식은 삶의 균형을 잡아주었다.



나를 채우는 휴식



  대학교에 진학한 나는 갑작스러운 자유를 얻게 된다. 생각 없이 일만 하다 해방된 노예가 어디로 가겠는가? 평생을 별다른 목적과 생각 없이 공부만 하며 살아왔는데, 이젠 내가 걸어갈 길을 스스로 정해야 한다고? 전 국의 모든 학생을 수능 성적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건 매우 잔인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무엇으로 평가받을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방황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내가 알던 유일한 휴식을 취했다. 판타지 소설을 읽고, 게임을 했다. 강의 시간을 제외한 하루 종일.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본래 휴식은 고생한 나에게 주는 보상이었다. 그러나 이젠 별다른 고생이 없어도 휴식이 주어졌다. 삶이 평안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상태를 평안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뚜렷한 대조군이 없는 휴식은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휴식을 지속할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나의 욕구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어떤 점이 부족한가? 공부를 한다고 억눌러왔던 자아실현 욕망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많은 활동들을 참여하기 시작했다. 3개의 동아리를 참여하고 1개의 동아리를 만들었다. 여러 캠페인을 벌이고, 각종 캠프에 참여하고, 많은 행사에 지원을 가고, 다양한 외부 강의를 신청하여 배우고, 짧은 교환학생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애를 했다.

  '나를 채우는 휴식'을 통해 나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챙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나를 비우기만 해서는 알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분야를 알고, 전문가들의 활동을 접할수록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장점을 흡수하고 싶었다. 새로운 행동은 새로운 생각을 만들었다.

  항상 비어있던 나는, 비로소 많은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나를 되돌아보는 휴식



  '나를 채우는 휴식'을 통해 나는 많은 것들로 가득 찼다. 아니, 가득 찬 걸 넘어서 넘치기 시작했다. 내가 얻은 깨달음들이, 단기간에는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넘치는 깨달음들을, 단지 '나를 비우는 휴식'을 통해 지워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나를 되돌아보는 휴식'이 필요했다.

  '나를 되돌아보는 휴식'의 시작은 행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휴대폰 등 다른 모든 외부의 자극을 멀리하고, 내 생각에 집중한다.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활동했는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어땠는지 되돌아본다. 내가 이 활동에서 새겨갈 점은 무엇이지? 내가 상대에게서 배우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나의 장점과 단점은 어떠하지? 저러지는 말아야겠다 싶은 점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하던 생각을 계속 반복하고 있단 걸 깨닫게 된다. 정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선택한 방식은  녹음이었다. 휴대폰 녹음을 켜고 머릿속에서 맴도는 수많은 말들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소재 하나당 약 30~40분의 말들이 나왔다. 파일을 재생시켜 어떤 말들이 나왔는지 들어봤다. 우당탕탕 거리며 내뱉은 말들이, 전부 진지하기 짝이 없는 것이란 사실에 웃음이 난다. 생각이 정리되며 시야가 밝아진다. 그러나, 혼자서 한참 떠드는 행동은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 좋았다.

  그래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휴대폰의 노트에 간단하게 기록한다. 짧은 노트들이 다닥다닥 저장된다. 이 노트들을 다시 보는 일은 잘 없다. 어차피 뒤에 보더라도 그때의 감정을 되살리긴 힘들다. 그저 글쓰기 자체가 주는 편안함에 취한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날이면, 컴퓨터에 앞에 앉는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돌아다니는 단어와 문장들을 잡아 끄집어낸다. 가시화된 문장은 생각 정리에 훨씬 효과적이었다. 소재 하나당 약 A4 2~3장 분량이 나왔다. 녹음에 비하면 훨씬 효율적이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독서 또한 '나를 되돌아보는 휴식'에 해당한다. 여기서 말하는 독서는 판타지 소설이 아닌, 양질의 서적을 깊게 집중하여 읽는 것이다. 나는 본래 많은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 생각에 확신을 주는 것들을 찾아 읽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지식을 쌓고, 교양을 쌓기 위한 목적이라면 '나를 채우는 휴식'에 더 가깝겠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독서를 '나를 되돌아보는 휴식'으로 정리했다. 카페 한편에 자리 잡고 앉아 전자책을 켜고 구절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나간다.

  방 정돈을 하듯, 어질러진 퍼즐을 맞추듯, 생각을 정리하고 나면 한층 성숙한 나를 맞이하게 된다.

    


나를 나누는 휴식  



  앞선 3가지의 휴식 방법으로 나를 회복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살아가며 혼자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 마주하게 된다. '나를 나누는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다.

  셋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마른 몸으로 울던 모래를 떠올렸다. 그날 모래의 말과 눈물이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됐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 최은영,『내게 무해한 사람 』, 문학동네(2019)

  '나를 나누는 휴식'의 필요성을 깨닫기 이전에도, 혼자선 벅찬 일을 남들과 얘기한 적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편집증적인 책임감이 있었다. 남들에게 고통을 얘기하는 것은 내가 나약 하단 걸 증명하는 일이었고, 약점으로 보일 수 있었다. 남들을 신뢰할 수 없었다. 사실, 무엇보다 내가 신뢰하지 못하고 있던 건 '나'였으면서 말이다. 여러 경험을 통해 성숙해진 후에야, 나는 '나를 나누는 휴식'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위에서 인용한 문구처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며 표현하는 건,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용기를 가진 나는 '나'를 유지하면서, 친구들과 대화하며 고민을 풀어낼 수 있었다. 내 생각보다 내 친구들은 훨씬 강했다. 내가 내뱉는 고민들에 휩쓸리지 않았다. 나는 좋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런 좋은 친구가 내 곁에 있다는 건 나도 그만큼 좋은 사람이란 걸 새삼 느낀다. 고민을 나누어 부담해준 친구들에게, '들어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잊지 않고 남긴다.

  한편, '나를 나누는 휴식'은 내가 혼자만의 깨달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과 감동을 나누고 싶을 때도 필요하다. 이를 행동으로 실천한 것이 독서모임이다. 독서모임에서는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사람책'도 읽게 된다. '책'자체의 감동과 더불어 '사람책'을 통해 한 사람의 생각과 삶을 책처럼 풀어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술자리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속마음을, 독서모임에서는 취하지 않아도 나눌 수 있다.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라도,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뜻으로 생각되어 기쁘다. 또한, 나의 의견에 감탄하는 사람들로부터, 내가 천형(天刑)으로 여겨왔던 '생각에 빠지는 병'이, 누군가는 갖길 원하는 '생각하는 능력'임을 느낀다. 독서모임으로 받은 감동이 커서, 직접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처음은 1:1 모임이었고, 다음은 9명으로 시작한 영화&독서 모임이었다. 이 활동들로 얻은 느낌은 새로 글을 한 편 쓸 수 있을 정도로 많다. 지금도 주변 친구들을 열심히 꼬시고 있지만, 아쉽게도 호응이 좋진 않다. 잘할 자신 있는데!

  브런치에서 하고 있는 '글쓰기'도 나를 나누는 휴식이다. '나를 되돌아보는 휴식'의 글쓰기와 다른 점은, 공개된 장소에 글을 올리기 위해선, 독자를 고려한 정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지 생각해보게 된다. 격하게 감정적이었던 부분은 다듬고, 잊고 있었던 추억은 되살린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떳떳하게 나의 마음을 드러내는 행동을 통해 자신감도 얻게 된다. 나아가, 소중하고 감사한 피드백들을 통해 따뜻함과 위로를 얻게 된다. 나의 생각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느꼈을 때, 따뜻한 충족감이 마음 가득히 차오른다.

  나를 좋은 사람과 나누며, 내 속에 가득한 나를 덜어내게 된다.






지친 일상에 쉼표 찍기



  일을 시작한 직후에는, 퇴근 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콕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나 게임과 판타지 소설만 읽으며 끝도 없이 늘어지다 보니,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집을 떠나기 위해 컴퓨터의 모든 게임을 삭제했다. 그리고 루틴을 만들었다. 만날 사람도, 불러주는 사람도 없다 보니 계획을 세울 시간은 충분했다. 주 3회 운동, 주 3회 미술학원으로 퇴근 후를 계획했다. 지금은 부상으로 운동 대신 독서를 하고 있지만, 운동이든 독서든 학원이든 유동적으로 일정을 조정 가능하기에 전혀 부담이 없다. 덕분에, 당일 갑작스러운 약속이 생기더라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4가지 휴식을 골고루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유효한 휴식 방법들을 정리하고, 루틴을 설정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뿌듯하다. 내가 나에 대해 이렇게까지 알게 되다니?! 휴식 분야별로 여러 가지 활동을 정해놓아서, 특정한 방법을 할 수 없을 때도 다른 방법들로 대체하여 휴식할 수 있다. 내가 불안하거나 우울해지더라도 회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마치 '나 사용 설명서'를 집필하는 느낌이다. 온전한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단단한 안정감을 준다.

  휴식 뭐 별게 있겠어하며 쉽게 끝날 글로 생각했는데, 정리하다 보니 길어졌다. 그럼에도 노래 감상, 샤워 등 글의 말미에서야 생각난 휴식들도 있는 걸 보면 내가 나를 너무 과소평가했나 보다. 이번 글을 다시 읽어보니 휴식과 취미를 구분 없이 적어놨다. 나에겐 취미생활이 곧 휴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이렇게  글쓰기를 한 덕분에, 정신없던 일상에서 나를 되돌아보며 큰 쉼표를 찍고 가게 되었다. 나아가 내가 쓴 이 글이 다른 누군가가 '휴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쉼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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