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발행한 『조선자동차운수사업요람』 중 「강원도자동차운수상황」 편에 강릉~삼척 간 노선에 대한 운수 현황이 정리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업자명: 강릉상사주식회사
운전계통구간: 강릉~삼척
거리: 64.8km
소요시간: 3시간
운행횟수: 2회
주요경과지: 옥계, 발한, 북평
운임: km당 4.6원(편도: 2원 97전)
비고: 울진‧삼척합동자동차회사와 공동 경영”
이 당시 자동차는 주로 철도역과 연계하여 목적지까지 승객들을 운송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이 책에서 금강산 관광 거점인 온정리와 다른 곳을 잇는 자동차 편도 확인할 수 있다.
최철 전 연세대 교수는 『강릉, 그 아득한 시간』(2005)에서 1930년대 당시 강릉의 자동차 운행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30년대 버스 운전기사는 몇 사람 되지 않았고 사회적 대우도 지금과는 달리 우러러보는 대상이었다. 봉급 또한 넉넉하게 받았다. 당시 버스는 숯을 태워 물을 끓여 운행했는데 숯은 지금의 가스와 같은 역할을 한 연료였다. 또한 버스에는 조수가 있어 시동을 걸 때마다 버스 앞머리에서 시동을 거는 쇠막대로 엔진을 돌려 겨우겨우 시동을 걸곤 했다.
강릉에는 시내 중앙 대정정[大正町] 부근에 버스 터미널인 동해상사가 있었다. 동해상사의 주주는 일본인들이었고 조선 사람으로는 당시 갑부였던 최준집 한 사람이 있었다. 버스노선은 강릉에서 주문진을 거쳐 양양까지 가는 동해북부선이 하루 한 번 있었다. 서울을 가자면 양양까지 버스로 가 그곳에서 다시 열차를 이용, 원산으로 간 후 경원선을 타고 서울로 가야 했다. 그것이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유일한 교통망이었다.
한편, 남쪽으로는 묵호와 삼척을 거쳐 울진까지 운행하는 노선이 있었고 서쪽으로는 평창, 진부, 대화를 거쳐 제천까지 운행되는 노선이 있었다. (중략)
당시 나는 버스를 타는 것만으로도 큰 호사를 하는 것 같았고 버스를 타고 주문진 외가를 가는 날이면 어린 마음에 아침부터 괜히 기뻤었다. 또한 외할아버지께서는 버스를 타고 집에 들르곤 하셨는데 버스를 구경하러 동해상사까지 마중 나갔다. 버스는 은색이었고 정원은 24명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주문진, 강릉 구간은 하루 2회 운행되었고 소요 시간은 1시간이었다.”
지금은 대형 고속버스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강릉에서 삼척까지 약 1시간이 걸리지만 1930년대 후반 비포장도로를 덜컥거리며 3시간이 걸리던 운행상황과 비교하면 아주 다른 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