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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Aug 25. 2023

조건 없는 안전지대 나의 오두막에서

나를 방방 뛰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한 달도 전부터 목이 빠지게 기다려 온 디데이 날이다. 눈이 떠지자마자 그날임을 자각한 요동치는 마음이 거울 앞에서 네모 모양 입으로 씨익 웃어 보인다. 나에게 조건 없는 행복 양식을 만들어주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요즘이다. '난 무엇에 마음이 끌리고 무엇을 할 때 찐텐이 나올까?' 지난 여행에서 나를 감각하며 문제에 대한 답의 힌트를 얻고 그동안 내 인생에 '진짜' 인생이 있었는지 궁구 했다. 앞사람, 옆사람, 뒷사람 어딜 돌아봐도 그렇게 하니까 그게 '좋음'이라 인식하게 되는 거 말고, 제도와 매체가 만들어낸 '임무'나 '역할' 말고, 광고가 찍어내는 '욕망' 말고. '영혼'의 본령에 따라 의식에 앞서 몸이 먼저 반응하게 되는 일. 그것이 인생 안에 있어 '진짜' 인생이 있었는지 고구 했다.



여행에서 재발견한 여러 개의 행복 패턴 중 하나는 레트로한 무드였다. 어린 시절 열광했던 그 질박한 모양 그대로 방방 뛰게 할 만큼 마음이 쏠리는 것. 나의 좋음을 다시 꺼내온 건 그 여행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나 같은 사람이 어딘가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모임을 알아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눈에 마음이 빼앗긴 모임 하나를 발견했다. 기록들을 읽어 내려가며 이미 마음은 홀랑 넘어갔지만 상념이 흘러넘치는 내향인은 온라인 가입에만 망설임의 며칠이 필요했다. 가입 승낙이 떨어지고 채팅방 안에 들어가 보니 300명 가까이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곳엔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의 카테고리의 '옛날'에 정성을 부으며 이어가는 마음들이 살고 있었다.



가입한 지 얼마 안돼 마침 정모 날짜가 잡혔다. 단김에 소뿔 빼듯 큰 맘먹고 신청을 하고 준비 모드에 돌입했다. 준비해야 하는 몇 가지 항목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대관한 스튜디오의 레트로한 무드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가야 했다. 스튜디오는 영화 「써니」 나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볼 듯한 80년대 후반 '좀 사는' 가정집 느낌이었다. 응팔의 덕선이 집보다는 정봉이네 집이 연상되었으니까. 큰 규모의 거실 한쪽에는 풍금이 맞이하고 있었고 민트색보다 옥색이란 낱말이 어울리는 고운 패턴의 주방 싱크대, 안방으로 추정되는 곳에 '그 시절을 상징하는' 자개 장식장이 반짝이며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들을 넘겨볼수록 구수하고 정이 넉넉한 할머니 집이 연상됐다.


좋아! 이번 모임 착장은 여름방학을 맞이해 할머니댁에 놀러 간 손녀딸 콘셉트야!






5분 만에 떠오른 아이디어로 옷장을 열고 아끼는 빈티지 잠옷 원피스를 구석에서 꺼냈다. 힘 있는 레이스가 끝단에 나풀거리는 새하얀 원피스. 우측 하단에는 하늘하늘 날리는 꽃들이 곱게 수놓아져 있다. 십수 년 전 구입하고 두 번 정도 입었는데 대부분 처분하고 나눔 한 빈티지 의류들 중 용케 얘만은 정리하지 않고 갖고 있었다.


'옳거니! 지금이 너의 존재를 뽐낼 순간이네.'



두 번째 준비 항목은 음감회에서 함께 감상할 노래 한곡을 골라가야 했다. 요즘 하루도 빠짐없이 즐겨들을 만큼 푹 빠져있는 옛날 노래는 너무 많은데 딱 한 곡이라니. 몹시 가혹한 일이다. 몇 주 고심 끝에 지난 여행에서 영감 받은 곡 중 하나를 선택했다. 어렸을 적 아빠 차 뒤에서 자주 듣던 올드팝 중 하나였는데 구만리 떨어진 타국의 재즈바에서 이 노래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모든 감각이 낯선 곳에서 한동안 잊고 지내던 음악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낭만이란.. 참 새롭고도 익숙하다. John Denver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라는 곡인데 듣고 있으면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진다. 거슬림 없이 귀가 편안해져 주말 오후에 스르륵 눈이 감기는 무드. 대여한 공간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내 기준 제일 하이라이트라 별표 백 개를 쳤다. 바로 옛날 오래된 물건이나 추억의 물건을 갖고 오는 것이었다. '이건 내 전문이지.' 꼬꼬마 시절부터 덕후, 덕질, 수집광이라는 명사에 잘 어울렸던 나였다. 이야기를 더하고 의미를 부여한 것은 작고 하찮은 것이라도 일단 모으고 봤다. 놀이공원 티켓, 기념우표나 스티커, 영수증, 영화 팸플릿 하다못해 도넛을 살 때 트레이에 까는 종이가 특별하게 이뻐서 가져와 모으곤 했다. 크면서 대다수 정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믿을 구석이 있었다. 아빠 집에 가서 내 보물 상자들을 엎어놓고 열심히 뒤졌다. 일단 목표는 두 가지. 워크맨 카세트를 지나 잔뜩 붙인 스티커로 취향을 뽐낸 CD 플레이어와 생일 선물로 받은 키티 체크 패턴 손목시계. 그 두 개를 제일 찾고 싶었는데 어디 있는지 한참을 뒤적여도 보이질 않아 끝내 포기했다. 그래도 고운 분홍색 키티 크로스백이랑 디즈니 프린세스 액자를 건져왔다. 집에 돌아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자를 엎고 난리 쳤는데 찾던 두 가지가 여기 가까이 있었다. 그 외에도 폴리포켓, 맥도널드 해피밀을 먹고 받은 테디베어, 바비 인형, 키티 수첩, 미니 색연필, 아이팟 시리즈, 2g 핸드폰 등 내가 살아온 서사가 담긴 아이들을 엄선해서 골랐다.



모임 당일 늦은 6시, 스튜디오에 모인 14명이 돌아가며 어떤 레트로에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지 자기소개를 했다. 내 차례가 돌아왔다.



저는 예전에는 70-80년대 유럽 빈티지 장신구나 작은 소품을 좋아해서 구경 다니고 수집하는 것을 즐겼는데 요즘에는 저의 구체적인 기억이 담긴 소품이나 무드가 더 끌리는 것 같아요. 그런 기억이 담긴 조각, 조각, 조각들은 저라는 사람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저는 충만한 행복을 느끼고 힘을 얻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 후로 더 좋아하게 되었어요! 이 모임에도 그래서 가입하게 됐고요:D

 


무사히 소개를 마치고 가져온 물품들을 꺼내는 시간. 가방을 엎어 바리바리 싸 온 물건들을 꺼내 바닥에 펼치니 웅성웅성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다. 고개를 들어 쓱 한 번 훑어보니 나만큼 극성으로 준비해 온 사람이 없다. 순간 살짝 민망.. '너무 오버했나? 괜히 이렇게까지 준비했나? 어떡하지. 좀 창피해. 가방 안에 아직 한 참 남았는데 다 꺼내지 말까? 손이 안 움직여.' 1초도 안 된 시간에 생각 풍선들이 앞다투어 마름모 문양의 나무 천장을 메운다. 그 뒤 생각 풍선을 꺼트리는 말풍선들이 따라온다.



와 우리 모임에 이런 분은 처음이에요.


벼룩시장 온 것 같아요! 아나바다 운동해도 되겠어요!


혹시 빈티지샵 운영하세요?


이 분은 빈티지에 정말 진심인 것 같아요!



진심이라.. 진심이란 무엇일까? 진심의 사전적 정의는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이고 불교적 언어로는 '참되고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체'로 번역한다.


'그렇구나. 나는 어려서도, 지금 이 자리에서도 여기에 진심이구나.' 그 어떤 조건 없이 그저 나를 기쁘고 행복하게 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한 달 넘게 이 모임을 준비하며 마음을 다했다. 조금이라도 하기 싫거나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면 금방이라도 때려치웠을 거고 집에 가고 싶음의 풍선만 띄우고 있었을 거다. 그때 알았다. 이런 삶의 패턴을 생 곳곳에 짜둔다면, 허무에 지친 지상의 마음을 그 천으로 뽀득뽀득 닦아낼 수 있을 거란 것을. 조건 없는 행복만이 '진짜'의 인생에서 나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제일 아끼는 cdp와 키티 시계들


핸드폰들과 아이팟 시리즈를 보면 그때의 흐름을 알 수 있다:-p


하나의 존재가 수놓아진 물건들


좌)소싯적 키티도 키웠었다:D 우)내가 만든 게임이 들어있는 미니 키티 상자


찰흙으로 인형과 주사위와 게임판을 만들어 놀았던 어린 나. 팬더와 곰돌이 각각의 말 2개도 잊지 않은 섬세함ㅎㅎ 우승하면 분홍색 꽃 가마에 올라갈 수 있다XD


다양한 세상을 알게 해줘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던 샌디라이온 스티커



훅훅 진행되는 시간표에 따라 클럽장님이 준비한 미니 게임 시간이 됐다. 옛날 노래 전주 1초 듣고 가수와 제목 맞추기. 나는 또 '이건 내가 자신 있지! 요즘 가요톱텐만 주야장천 듣고 있는데' 하며 기대했다. 답을 맞히고 싶어 몸이 달았다.


정답! god 관찰!

정답! 유승준 나나나!

정답! 타샤니 경고!

정답! HOT 캔디!

정답! 브라운아이즈 벌써 일 년!

정답! 신화 Yo!

정답! SES Dreams come true!

정답! 박지윤 Steal away!


넘치는 승부욕을 주체 못 하고 정답! 정답! 외치고 연이어 답을 말하니 옆에서 '와..'하고 탄성이 나온다. '이걸 어떻게 맞춰요?' 물어오는 질문에 조금 우쭐하며 '헤헤.. 박지윤을 진짜 좋아했었어요' 대답한다.



다음 미니 게임은 랜덤으로 뽑은 질문 카드에 대한 답을 이야기하며 친밀도를 쌓는 순서였다. 취미를 묻는 물음부터 인생관을 파헤치는 심오한 물음까지 폭넓은 질문들이 섞여 있었다. 두근두근 내 차례. 망설임 없이 한 큐에 뽑은 카드를 뒤집어 확인하는 순간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어릴 적 꿈은 뭐였나요? 지금의 꿈은 무엇인가요?' 길고 긴 내 꿈의 서사를 어떻게 압축 요약해서 말해야 할지 머릿속은 백지장이 된 동시에 입술이 떼지고 필터를 거치지 않은 자유로운 흐름대로 말은 흘러갔다.



어렸을 때는 그림 그리고 만드는 걸 좋아해서 그런 일을 하고 싶었어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작가라는 자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쓰고 그리려고 노력해요. 자주 죽는 저인데 그런 저를 살게 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 게 제 꿈이에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대답을 어찌어찌 마쳤다. 오늘 처음 보는 얼굴들을 마주하며 저 아래 찌꺼기로 남아있는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어딘가 멋쩍기도 후련하기도 하다. 옹골진 4시간을 보내고 집에 가는데 멤버 한 분이 쪼르르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아까 말씀하실 할 때 울컥하는 것 같았는데 괜찮아요? 저도 예전에 미술 해서 뭔지 알아요. 지금은 하지 않지만..


집에 가는 길 반짝이 가루가 묻은 말이 길에 곱게 뿌려지며 밝혀준다. 주위는 진작 어두컴컴해졌지만 반짝거리는 길 덕분에 마음 놓고 나누고 공명할 수 있었다.



삶을 만들어내는 조각조각을 재료 삼아 날실과 씨실로 짜내 나만의 패턴을 만들어내는 일.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지루한 삶의 관성을 깨며 열심히도 행복하고 깊이 있게 몰두했다. 방 한 편에서 나의 분신들과 애정 담긴 무음의 교신을 하다가 함께 바깥세상을 구경함으로 새로운 조각이 생겼다. 툭하면 잿빛으로 덮이는 삶을 지탱해 주는 조각을 하나 더 얻게 된 날. 구질구질 구차하고 삶이 추울 때는 모아 온 조각들을 꺼내 만지작거린다. 기억의 조각조각이 가닿아 추스른 마음으로 내일도 살아간다. 누구도 나를 해칠 수 없는 조건 없는 안전지대, 나만의 작은 오두막으로 떠나 패턴 짜는 일에 주저 말고 더 부지런해야겠다고 보드라운 바람이 마음에 술술 불어오는 하루다.



한 달 전부터 극성 떤 덕분일까. 콘셉트에 충실한 베스트 드레서로 뽑혀 귀하디 귀한 우표 상품까지 받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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