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경과 자경

by 모든 햇살

작고 흰 집은 풍차를 닮았다. 그 집엔 유난히 낮은 창이 열려있고 창 옆엔 작은 메뉴 칠판이 걸렸다. 봄 햇살 받은 흰 벽엔 여러 색깔의 아이스크림이 커다란 콘 위에 쌀자루처럼 쌓여 있다. 가게 앞 야외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한 통씩 들었다. 백발의 어르신과 어린아이가 모두 아이스크림에 부드럽게 녹아드는 오후, 남편도 민트 초콜릿칩 아이스크림을 한 통 받아들고는 아이처럼 웃는다.

남편과 나는 가게 건너편 차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차창 너머 가게로 다가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보인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은 한 손을 청바지 주머니에 반쯤 찔러 넣고 얇은 봄 자켓으로 멋을 냈다. 아이가 메뉴를 고르고 주문하는 동안 아빠는 한 걸음 뒤에 물러서 있다. 시간이 지체되는 데도 조용히 기다려준다. 무심한 척 먼 산을 보는 것 같다가도 아빠의 눈길은 자꾸 아이의 뒤통수에 돌아와 앉는다.

주문이 끝나고 나니 아빠는 아이가 계산기에 카드를 넣도록 도와주고 다시 한 걸음 물러선다. 아이스크림에 설레는 마음인 양 아이의 곱슬곱슬한 앞머리가 바람에 살랑인다. 마침내 창에서 아이스크림 통을 든 손이 쑥 삐져나오자, 아이는 보물을 받듯 두 손으로 공손히 받고 감사를 잊지 않는다. 아들과 아빠는 서로에게 미소를 던지고 사월의 한낮 햇살 속으로 걸어간다. 한 폭의 그림이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길 건너 누군가 그들 때문에 잠시 행복에 젖었다는 것을.

두 남자의 덩치 차이는 엄청나지만, 몸짓은 서로를 존중하는 친구 사이 같다. 아이에게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의젓한 몸짓이 보인다. 아빠는 아들을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취급하지 않고 한 사람의 개체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도록 시간을 준다. 재촉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때만 슬쩍 도와주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척 뒤로 물러선다.

큰아이가 저 아이 나이였을 무렵, 아이는 금요일마다 진흙투성이가 되거나 얼굴이 까맣게 타서 돌아오곤 했다.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의 확고한 철학으로 금요일마다 아이는 자연 속에서 뒹굴었다. 얼마가 지나자 아이는 풀, 벌레, 곤충의 이름을 곧잘 알아맞힐 뿐 아니라 웬만한 등산길이나 계곡도 겁내지 않고 폴짝폴짝 잘도 따라다녔다.

처음 자연학습을 하는 도시 아이들은 살짝 가파른 오르막이나 논둑길에서도 울음을 터뜨리곤 한다고 했다. 그럴 때 선생님들은 안아 올려주지 않고 스스로 걸음을 떼도록 오래 기다린다. 도움이 꼭 필요할 때는 아이 자신이 해냈다고 생각할 정도로 꼭 필요한 도움만 슬쩍 주고 빠지는 방식을 택한다고 했다.

봄날 차창 밖 풍경 한 점으로 엄마로서의 나를 생각한다. 권위의 사용이 방자하지는 않았는지. 내 편의 위주는 아니었는지. 아이들 각각의 오묘한 빛깔이 나로 인해 흐려지지는 않았는지. 기다려주지 못하고 다그치지는 않았는지.

이제는 화병에 꽃을 담고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고 가만히 기다릴 시간이다. 아이들이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면 두 팔로 안아주는 일 외엔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시간을 돌이킬 순 없지만 아직 배울 수 있으니 그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풍경이 마음으로 들어와, 차경(借景)으로 자경(自景)이 가능하다는 것은 더욱 감사할 일이 아니냐고. 아이스크림 한 술을 입안에 밀어 넣으며 나를 다독인다. 민트가 입 안에서 시원하게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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