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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ug 17. 2023

거기

현재를 헤엄치는 물개처럼

   발라드 운하에서 뜻밖의 공연을 보았다. 유니언 호수에서 바다로 물이 떨어지는 지점에서 물개 한 마리를 만났다. 물을 푸우 뿜으며 귀여운 얼굴을 드러내더니 공연을 시작했다. 꼬리만 부채 모양으로 물 위로 올려놓고는 뱅글뱅글 돌기도하고 한 손을 지긋이 이마 위에 대고 땀 닦기도 했다. 모든 동작은 유연하고도 느긋했다. 조련사가 미끼로 훈련시킨 동작이 아니었다. 물이라는 터전을 맘껏 누리고 있는 녀석. 그 몸짓에 배인 여유에 그만 넋을 잃었다. 나는 세상이 흔들어대는 미끼에 따라 지나치게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녀석이 말을 건넸다. “ 나 좀 봐요. 쉬엄쉬엄 하라고요.”  

   세상이 변해가는 속도에 놀랄 때가 있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를 통해 배우자를 만난다고 한다. 퓨전이라는 말이 음식에서 문학까지, 하이브리드라는 말이 꽃에서 자동차까지 퍼져나가고 있다. 유기농 식품인지,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식품인지를 포장지에 표기해야 한다. 몇 달 전에 산 기계가 이미 구형이 되어버리는 시대이니,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아득한 과거로 순식간에 밀려나버리는 건 아닐까 염려스럽다. 

   부지런히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을 익히려 애써보다가도, 때때로 지나간 삶의 모습이 불쑥불쑥 그리워진다. LP 레코드 판 위에 바늘을 올려놓으면 곡이 시작되기 전 몇 초간, 바늘이 따끔따끔 판 위를 도는 소리는 설렘이었다. 신청곡을 보내놓고 시간 맞추어 라디오 앞에 귀를 기울이던 별이 빛나던 밤도 있었다. 설렘이나 기다림, 그리고 허공에 팔을 저으며 카라얀 흉내를 내게 하던 그 공명은 오래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컴퓨터와 전화로 듣는 소리의 음질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데 성형한 미인처럼 어쩐지 느낌이 쌀쌀맞다.

   요즘 기계들은 말을 한다. GPS도 밥통도 내게 말을 건다. 목소리도 상냥하고 친절하다. 그래도 그녀들의 도움을 받는 일을 최대한 절제한다. 나를 통제하려는 듯해 기분이 좋지 않다. GPS는 목적지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을 제공할 뿐, 35가의 단풍이 유혹하는 가을날과 샌드포인트 웨이를 끼고 달리며 호수를 바라보기 딱 좋은 날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가 정말 알 수 없는 것은 내가 아침에 갔던 길로 저녁에 다시 돌아오는 것을 싫어하는 이상한 여자라는 점이다. 

   유행과 관계없이 세대와 세대를 이어 굳건히 사랑받는 책을 고전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른다. 고전은 나이 들어가는 엄마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함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니 고맙다. 도서관에 가보면 또 하나의 장르인 양, 구별된 책장에 고전을 모셔둔다. 책들의 명예의 전당인 셈이다. 

   한 권의 고전은 오래전 부활절 새벽에 만난 어느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해도 없고 차도 없는 그 시각에 어둠을 뚫고 얼마나 걸으신 걸까? 한복 끝자락으로 타박타박 안개를 밀어내며 예배당 문에 이르시더니 그제야 굽은 허리를 세우셨다. 곱게 빗어 넘긴 올곧은 할머니의 가르마가 눈에 들어온 순간, 눈시울이 뜨거웠다. 시간과 유행에 따라, 실리에 따라 어지러이 돌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이었다.    

   영월 장릉 옆엔 ‘거기’라는 이름의 양식집이 있었다. 없는 듯 있는 그 이름이 좋았다. 거기는 꽤 오랫동안 거기 있었나 보다. 택시를 타고 ‘거기요!’ 하면, 감사하게도 기사들은 거기를 알고 있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엔 어른이 되어가느라 힘겨웠던 나의 저무는 이십 대가 있다. 남편과 함께 장릉 산책길에서 돌아올 때 쏟아지던 봄볕을 다 받던 내 노란 스웨터가, 그리고 차 뒤로 집 뒤로 숨으며 우리를 따라오던 반 아이들이 있다. 이 안 닦는 애도, 오락실 단골인 애도, 꼴등 하는 애도, 포졸이 되어, 임금님이 되어, 주막 아줌마가 되어 모두 햇살 아래 환하게 웃던 단종제 퍼레이드가 있다.

   영월에 가면 택시를 타려한다. 내가 “거기요!” 하고 말할 때 기사가 “어디요?”하고 되묻지 않기를 바란다. 주름이 늘어가는 내가 어느 날 불쑥 나타난다 해도, 여전히 어제 만났던 친구처럼, 가벼운 미소로 맞아주는 곳이길 바란다. 거기서 나는 어수선한 걸음을 멈추고, 현재라는 선물을 요리저리 만져보는 한 마리 물개여도 좋다. 거기는 한 권의 고전을 빼어드는 도서관의 조용한 구석, 등 떠미는 시간을 잠시 외면하고 홀연히 몸을 던지는 시간 속의 한 점 블랙홀이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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