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린손 Oct 26. 2022

남은 생의 여정을 쓰다

나무로 만든 펜

목공을 시작하고 선물하는 일이 많아졌다.

원래 누가 나를 챙겨주는 것도 어색해하고 누굴 챙기는 것도 잘하지 못하던 사람이 목공을 해서 갑자기 인간이 관대해지고 인간성에 개벽이 온 것은 아니다. 

이것저것 만들다 보니 단순히 줄 수 있는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가구를 만들고 나면 애매한 자투리가 생긴다. 그럴 때 자투리를 이용해서 다양한 소품을 만들며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데 주로 도마, 연필꽂이, 트레이 등등 특별히 필요해서 만드는 경우보다 '그냥 있으면 좋을법한' 소품인 경우가 많다. 비교적 힘이 들지 않고 결과물이 빨리 나오는 우든펜도 그중 하나이다. 그러다 보면 집에서 허용할 수 없을 만큼의 물건들이 생긴다.


그렇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무언가 준다는 것은 물건을 건네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무뚝뚝한 말투로 '오다가 길에서 주웠다'하며 꽃다발을 내미는 손에는 꽃다발과 부끄러워서 차마 표현은 못하지만 상대를 향한 마음이 함께 담겨있는 것이다. '이런 걸 뭣하러 주워왔노' 하며 꽃다발을 쥐는 손은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꽃다발뿐만 아니라 그 마음을 함께 쥐는 것이다.

특별한 대상을 생각하지 않고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을 줄 때도 상대에게 어울릴법하거나 소용에 닿을 법한 것을 고르는 것부터 마음이 상대를 향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정한 대상에게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 물건을 만들 때는 그 마음이 작업 시작부터 묻어나기 시작한다.

예전 싱가포르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가 말기 직장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보다 서너 살 어린 아직 창창한 나이이다. 의료기술이 좋아 치료 가능성도 있다고 했지만 직장암은 암 중에도 치명적인 것이어서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린아이를 둘 둔 아빠였다.

멀리서나마 위로의 말과 함께 그 친구에게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어졌다. 머지않아 생을 달리할 수도 있는 친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항상 지닐 수 있고 매일 사용할 수 있는 펜을 하나 만들어 주기로 했다. 나무는 유창목lignum vitae을 택했는데 특유의 향이 있어 향수의 원료로 쓰이기도 하고 자외선에 노출되면 초록색으로 변하는 밀도가 매우 높은 나무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무의 상징이 '회복, 생명력' 등이라서 친구가 그 상징을 알리 없지만, 그것으로 하기로 했다. 밀도 높은 나무에 묵직한 펜 부품을 써서 제법 고급스럽게 잘 나온 펜에 그 친구의 이름을 각인하여 위로의 메모와 함께 보냈다.


얼마 후 그 친구가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왔다.


Thank you very much for the pen.

.......

I will write the rest of my journey with the pen you made.


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

내 남의 생의 여정을 이 펜으로 쓰겠습니다.


죽음이 저만치 보이는 길목에서 서있는 친구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내가 더 고맙고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깟 펜 하나가 그의 남은 인생을 기록하는데 쓰인다는 것은 나에게 감동이자 동시에 애처로움이었다.


그 후에 그 펜으로 무엇을 쓰기 시작했는지 물어본 적은 없다. 정말 그때부터 얼마가 될지 모를 남은 삶의 여정을 쓰기 시작했다면 지금쯤 아마 노트 몇 권은 나왔을 것이고 펜은 이미 심이 다 닳아 새것으로 갈아야 할 것이다. 그의 여정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그 펜을 기억이나 할까 모르겠지만 그가 받았을 때 잠시라도 힘이 났다면 나는 그걸로 족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셋째를 낳아 키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백만분의 일 쯤은 회복과 생명력의 상징을 가진 그 펜의 덕이지 않을까 흐뭇하게 생각해본다.






우든펜은 목공의 기초 없이도 쉽게 배울 수 있다. 보통 가구는 단순한 것이라도 며칠이 걸리는데 비해 우든펜은 몇 시간 만에 두세 개는 만들 수 있다. 목선반에 나무를 끼우고 고속 회전할 때 칼을 대서 원하는 모양을 깎는 것인데 도자기공방에서 물레를 돌려 흙덩어리를 손으로 성형해가며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깎은 나무를 펜키트(우든펜용 펜키트)와 연결하면 나만의 펜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레이저각인기로 이름을 새기면 정말 세상에 유일한 펜이 된다. 같은 나무라 해도 무늬와 색감이 다 달라 유일하다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내 이름이 새겨진 선물을 받는 것은 굉장한 감동이다.

많은 선물을 해봤지만 가성비 최고의 선물이다.

목선반의 원리를 배우면 펜뿐만 아니라 그릇, 접시, 체스 말 등 목공의 새로운 장이 열린다.



작가의 이전글 화투나 한판 칠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