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프랑스 방랑기
먹고, 자고, 영화 보고, 먹고, 자고, 드라마 보고, 12시간이 넘는 한량의 시간이 지났다. 안전벨트를 착용해 달라는 안내 방송이 들려온다. 곧 착륙한다는 의미다. 나는 여전히 한국발 비행기에 앉아있지만 내 몸은 이미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앞으로 벌어질 불투명의 여행에 심장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프랑스행 비행기표를 예매할 때부터 나 홀로 다짐한 것이 있다. '계획 없이 끌리는 대로 즐겨보자.'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20대 중반까지 필리핀,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일본, 총 5개국을 다녀왔다. 도시까지 따지면 5개국 9개 도시다(아마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다고 할 순 없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만의 여행 역사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계획이다. 나는 이 모든 여행에 철저한 사전 조사와 치밀한 계획을 동반했다. 그 나라를 직접 겪어보기 전부터 이미 내가 무엇을 먹을 것이고, 어디를 갈 것이며, 어떻게 이동할 것이고, 어디서 묵을 것인지 한국에서 모든 것을 확정한 후 떠났다. 그게 내가 여행을 하는 방법이었고,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에 대한 준비였다. 완벽한 계획과 준비는 여행 내내 별다른 어려움 없이 편안한 즐거움을 선물하지만 그 나라 자체를 제대로 즐기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걸림돌이다. 굳이 현지인에게 묻지 않아도 필요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고,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기에 특별한 돌발상황이 생기지도 않는다. 순서대로 짜인 이방인들의 관광지를 찾아다니느라 어쩌면 마주쳤을, 어쩌면 발견했을 그곳의 숨은 아름다움을 놓치게 된다. 그들의 일상을 공유하기보다는 다른 이방인들과 함께 유명한 관광지와 맛집을 차례로 방문하며 그 나라를 경험한 척한다. 과장되고 꾸며진 일부만을 마주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향에 돌아온다.
요즘 대한민국은 여행 유튜버들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영상을 순서대로 나열한 ‘인기 급상승’에만 들어가도 체감할 수 있다. 심지어는 인터넷을 넘어 공중파에서까지 만날 수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한 증명이다. 나 역시 그들의 열광적인 시청자 중 한 명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행 유튜버들은 모두 공통된 특징이 있다. 무계획의 유동적인 여행을 즐긴다는 것. 그 나라의 관광지보다는 일상을 경험하려 한다는 것.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 돌발 상황, 우연한 행운들이 여행을 이룬다는 것. 나의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던 형태이다. 그래서였을까. 눈으로 처음 겪은 무계획의 여행은 나를 매료시켰다. 계획을 세웠다면 피할 수 있었을 모든 상황들이 흥미로웠고, 계획을 세웠다면 만나지 못했을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여행을 하며 겪어내고, 이겨내는 모든 상황이 나의 본능을 자극했다.
‘그래, 이거야. 이게 지금 나에게 필요한 여행이다!’
깔끔하던, 지저분하던, 친절하던, 불친절하던, 맛있던, 맛없던 만족과 불만족의 파이가 감히 예상되지 않는, 몸으로 부딪히고 겪어내는 그런 모험. 아름답지만은 않은 민낯의 여행. 나는 원했다. 평탄하지만은 않을 그것을. 나는 되어있었다. 그 모든 것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고 즐길 준비가. 오히려 바랬다. 지극히 평범하던 나의 일상을 뒤흔들 수 있는 불확실의 자극이.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에 착륙 후 입국 심사를 위한 긴 줄을 섰다. 한국에서 구매한 프랑스 유심을 끼우고 휴대폰 전원을 켠다. 까마득한 심사대, 그곳을 지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계속 길어지는 줄에도 그다지 다급해 보이지 않는 심사원들. 나는 이곳에 꽤 오래 서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 시간을 함께 겪어줄 유일한 동료인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숙소에 가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그곳은 이틀을 묵게 될 한인민박으로 밤에는 와인과 함께하는 파티가, 아침에는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가진 사장님의 정겨운 고향 밥상이 존재하는 매력적인 곳이다. 나는 이곳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했는지, 이곳으로 향하기 위해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 것인지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단 1불의 유로도 준비하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 ATM을 찾아 돈을 뽑을 생각으로, 구글 지도가 알려주는 가장 빠른 경로의 대중교통을 이용할 생각으로 그렇게 입국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초보 무계획의 여행자치고는 꽤나 대담하고 무모한 시작이다. 이렇게 겁 없는 나를 위한 여행 신의 걱정이었을까(정보-나는 무교다), 여행의 시작에서 틈새의 시간을 선물한다.
"해는 떨어졌고, 유럽은 처음인데 아무런 준비 없이 온 그대여, 어서 살 길을 찾아라."
있지도, 믿지도 않는 신의 뜻에 따라 우선 카카오톡에 들어갔다. 숙소 주인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서. <카톡으로 문자 주시면 찾아오시는 방법과 교통권에 대해서 상세히 안내해 드립니다.> 숙소를 예약할 때 쓰여있던 한 줄이다. 이것은 겁 없는 여행자의 또 다른 믿는 구석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체크인 예정자입니다. 숙소까지 가는 대중교통 문의드리고자 연락드립니다."
전송.
메시지를 보내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생각보다 늦어지는 입국 심사에 밖은 벌써 컴컴하다. 나는 혼자고, 유럽이 처음이며, 어깨는 무겁고, 긴 비행에 지쳤고, 가방에 들어가지도 않는 아우터를 가져오겠다고 꾸역꾸역 입고 오느라 더워 죽겠다. 이런 상태로 대중교통을 타고 험난한 모험을 지속할 것인가, 잠시 브레이크를 밟고 편한 택시를 선택할 것인가... 이때 답장이 도착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갈 수 있는 다양한 교통수단 방법이 적혀있는 사진이다. 사진과 함께 그와의 첫 대화가 도착했다.
'참고해 주세요(이모티콘).'
친절하나 온도가 없는 답이었다. 그렇다. 그는 나의 가족도 지인도 아닌, 내가 묵게 될 한인민박의 주인장이다. 새삼 느껴지는 관계의 온도에 택시를 향한 선택지에 무게가 실린다. 먼 이국 땅에서 나의 믿는 구석이었던 얼굴도, 나이도, 성별도 모르는 그에게 비행에 지친 심신을 회복시켜 줄 따듯한 무언가를 바랐던 것 같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떤 대중교통을 이용할 계획인지, 짐은 많은지, 몇 시쯤 도착할 것 같은지 같은, 한국에서는 당연했을 나를 향한 관심과 걱정을 말이다.
'아 네네. 감사합니다.'
목구멍에 걸려있는 투정과 넋두리는 눌러두고 이틀을 머물 예정인 투숙객으로써 답장을 보냈다. 다시 혼자만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 고민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는 나뿐이라는 것을, 같이 의논해 줄 사람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구글 지도를 켠다. 숙소까지의 소요시간을 검색하니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수많은 합리화의 변명들이 떠돈다. 결국 그 모든 것들이 가리키는 길은 단 하나였다. <택시를 타라.>
택시를 타고 도착한 그곳에는 문자로 느끼지 못했던 따듯한 온기가 가득하다. 나를 반겨주는 사람들, 서로를 궁금해하는 날 것의 관심, 그러면서도 지켜지는 관계의 배려, 어색하나 신선한 대화와 웃음소리, 호기심 어린 맑은 시선. 잠시 머물다 갈 이곳에서 가능한 오래 간직하고 싶은 새로운 감각들이 나를 덮친다. 싱그러운 따스함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새로이 써지는 역사는 자극적이다.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파묻혀 휴식을 취하려던 나는 커피를 마신 듯한 지쳐있는 활기참으로 순간을 즐긴다. 그리곤 생각한다.
'아, 퇴사하고 프랑스 오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