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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린 Jan 05. 2023

그림으로 다채롭게 엮이는 유럽 역사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 독후감

다음 주 국립중앙박물관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를 보러 간다. 처음 시작했을 때쯤 광고가 눈에 띄는 시내버스들이 오가기에 가보면 좋겠네 생각했던 전시다. 19세기 이전의 세계사는 단편적인 사건들 정도로만 이해하는 데다 합스부르크 같은 유럽 가문의 이야기는 복잡하게만 느껴져 더더욱 공부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전시는 새로운 접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니 이참에 좀 알게 되겠다 기대했는데- 두 달째 흥미를 잃고 있다가 이번에 친구 따라 같이 가기로 했다.

공부하고 전시를 보러 가는 건 이번이 거의 처음이다. 예전 유럽여행(벌써,, 5년?) 당시 역사든 문학이든 더 많이 공부하고 오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던 탓에 전시와 함께 곧 떠날 교환학생을 준비할 겸 읽었다. 이번 전시가 아니라면 스스로 찾지는 않았을 책이지만 또 막상 흥미나 관심사를 돌아보는 뜻밖의 수확도 있어서, 일을 벌이면서 의도적으로 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삶을 다채롭게 하는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1273년(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독일의 왕으로 선출)부터 1918년(1차 세계대전 직후 카를 1세의 퇴위와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현재의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된 해)까지 무려 650년간 지속된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에서 가장 긴 역사와 전통을 가진 가문이다. 주요 인물의 초상화와 관련 명화를 통해 그 긴 기간을 다루는 이 책은 누구나 보고 느낄 수 있는 '그림'이라는 도구로 인물과 사건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저자가 역사와 예술에 조예가 깊다는 인상을 여럿 받았다. 유럽 중세&근대사에 충분한 이해가 없었음에도 편하고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었고, 마리아 테레지아를 일본 전국시대 무장 야마우치 가즈토요와 연결하거나(밀리의 서재 60%) 과거 빈에서의 오페라 관람 경험을 녹여내는 등 본문의 괄호를 통해 풍성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지식 전달이나 한자어의 사용에 어딘가 현학적인 구석이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읽다 보니 저자가 일본인이길래 후자는 그럴 만도 하네 싶었지만.. 무지를 불편함으로 잘못 이은 것일 수도 있겠으나 유난한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그래도 덕분에 새로운 어휘나 배경지식을 많이 알게 됐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푸른 피'에 대한 이야기로, 맥락이 없어 찾아보니 이베리아반도의 갈등의 역사 속 기독교도들이 고귀한 자신들을 이슬람교도들과 구별하기 위해 흰 피부에 정맥이 드러나는 자신들을 '푸른 피(blue blood)'의 계승자로 칭했고 이후 이 인식이 유럽 전반에 퍼졌다고 한다. 요즘도 그 흔적들이 언어에 남아 있다니 그들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합스부르크 가문도 순결한 피를 지킨다며 대를 이어 근친혼을 하는 바람에 자식들이 요절하는 웃픈 역사를 가졌던데, 생존을 위한 전략이 외려 경쟁력을 약화시켰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비슷한 맥락에서 거의 모든 혼인이 정략결혼이자 전적으로 부모의 결정이었다는 점도 새삼 경악스러웠다. 과거는 과거의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지만.. 뒤늦게 동생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나는 바람에 예비 여왕에서 외삼촌과 결혼해 요절하며 삶이 뒤바뀐 마르가리타처럼 현대인의 시선으로는 참 아이러니한 운명들이 많았다. 여성은 거의 아이를 생산하는 기계처럼 서술되는데,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그 시대의 상식들이다.


예술은 감상자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넓은 가능성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질감이나 색채 정도를 제외하면 회화 감상에 고유한 기준이 적어 그림 앞에서 종종 당황하는 내겐 저자의 감상 방식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인상적인 경험이 되었다. 인물화의 경우 눈빛이나 표정, 시선, 음영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모든 창작에는 의도가 들어있음을 새삼 다시 느꼈다. 그 시선과 표정이 다채로운 2장 <광녀 후아나>와 8장 <프리드리히 대왕의 플루트 연주회>, 시대상이 반영되고 각각 인물의 비하인드를 접하니 더 새로웠던 6장의 <시녀들>, 작가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너무도 매력적이었던 7장의 <베르툼누스의 모습을 한 루돌프 2세>, 수려함이 빛나는 11장의 <엘리자베트 황후> 등 인물과 시대의 역사와 미술을 함께 감상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비현실적 색채가 특징이라는 엘 그레코의 그림도 그 화려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익숙한 대상이 새로워지는 그 전환이 역사 공부의 가장 큰 매력포인트다. 결국 인간의 이야기, '카를로스 1세가 신성로마 황제로 즉위하다'같은 한 줄 서술 이면의 수많은 감정과 육체가 느껴지는 생동감이 좋았다. 빈과 인스브루크 등 무지했던 도시들이 스토리와 함께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 엘리자베스 1세나 헨리 8세 등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역사적 인물/사건들이 이야기에 엮여들어 짜임새를 더해가는 순간 등도 반가웠고 다소 지나친 의미부여의 측면도 있으나- 근대 유럽의 시작점으로 여겨지는, 30년 전쟁을 마치며 체결된 베스트팔렌조약의 서명지가 교환 파견도시 오스나브뤼크라는 사실도 내겐 너무 낭만적으로 다가온다(본문에는 30년 전쟁 이야기가 있고, 이건 교환 지원할 때 알게 되어 반가웠던 사실). 이외에도 유럽정치외교사 수업에서 『세계외교사』를 외우다시피 공부했는데 자유주의 운동이나 메테르니히, 비스마르크 등 그때 얽히고설켰던 유럽 근대사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중심으로 또 연결되는 지점들을 확인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역사는 역시 인물의 재미가 달려있다'는 저자의 맺음말에도 공감하고, 살이 붙으며 점점 더 입체감을 갖추는 과정을 느끼는 것이 역시 역사 공부의 큰 즐거움이다.




보통 역사 관련 책은 거의 모든 내용을 남기다시피 정리하며 읽는데, 이번엔 가볍게!라는 신년 모토에 따라 안 쓰고 즐기면서 읽었다. 그럼에도 끝나고 나서는 결국 성미를 못 이기고 다 정리했는데, 하면서 든 생각- 좋아서 하는 게 맞을까? 유럽 경험이 보다 더 다채롭길 바라는 마음에 영화도 문학도 역사도 더 경험하려 하는데, 이게 과연 100% 즐거운 걸까 아니면 일종의 애씀일까. 그래도 과정이 흥미롭고 이게 나중에 또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한 마음이 컸으니 재밌어하는 것이긴 할 테고 애씀이라 해서 안 좋은 것도 아니며 시키지 않아도 계속 하겠지만, 마음 어딘가엔 의문이 남는 것이다. 이건 내가 지금 태평하게 이러고 있을 때인가?라는 질문의 영향도 큰데 결국 그냥 무게를 내려놓고 가볍게 즐기면 그만이지 싶고- 이 의문을 남겨두고 싶었다.


끝! 이고 막간 상식 - 독일 도시 이름에 많이 들어있는 '부르크(Burg)'는 '요새', '성채'라는 뜻이라고 한다. 합스부르크는 하비히트(Habicht, 사냥매)와 부르크의 합성어로 추정된다고. 다음 주엔 전시 후기도 써봐야겠다.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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