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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독후기록 86] 이중섭 편지와 그림

그림이 들려주는 사랑과 삶의 이야기. 도슨트 이창용 강의 믹스

by 서민호

[그림이 들려주는 사랑과 삶의 이야기]

제124회 서구아카데미(2025.11.12) 이창용 도슨트 [이중섭 강의] 요약 및

[이중섭 편지와 그림(2000, 다빈치)] 독후기록.



겨울 추위입니다. 일이 있어 14일부터 18일까지 잠시 출국해 있는 바람에 정리가 다소 늦어졌습니다.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다, 어제 귀국하니 파카를 챙겨 입어야 할 정도로 춥더군요. 정리가 늦어지는 바람에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2000, 다빈치)]를 다시 꺼내 들어 여행 기간 중 읽게 되었습니다. 읽은 지 오래되어 기억이 희미해진 상태였는데, 강의를 듣고 다시 읽어서인지 내용이 쏙쏙 머리에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이창용 님은 도슨트로 제주 태생입니다. 3살까지 제주에 살았고, 그 이후로는 광주에서 오랜동안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외국에서 미술史(장 프랑소아 밀레 전공)를 공부하고 유럽 유수의 박물관에서 전시해설자 생활을 하다 2017년 말 귀국, 년 평균 300회가 넘는 강의를 진행 중입니다. 책도 여러 권 냈고 제가 좋아하는 분 중 한 명입니다.


‘소(牛)의 화가’ 이중섭. 호는 ‘대향’ ‘구촌’. 편지에선 턱이 길다고 해서 붙은 ‘아고리 君’을 애칭으로 사용합니다. 우리나라 대표 국민화가이자 ‘한국의 고흐’로 불립니다. 잘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실은 잘 모르는 그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 1916년 평양 위쪽에 위치한 평남 평원군에서 부농(천석꾼)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거기서 만난 일본인 후배 마사코(한국 이름 이남덕)와 1945년 해방 직전인 5월에 결혼합니다. 큰아들 태현(1947)과 둘째 아들 태성(1949) 그리고 조카인 이영진을 데리고 1951년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옵니다. 1951년 연초에 미군정 소개령으로 제주로 내려와 서귀포에 자리 잡아 그 해 12월 다시 부산 범일동으로 옮길 때까지 약 11개월간 서귀포에서 생활합니다.(이런 인연으로 서귀포에 가면 이중섭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52년 생활고와 질병 치료를 위해 와이프와 두 아들은 친정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이후 가족과의 재회를 위해 노력합니다.(한일 간의 국교가 정상화된 게 1965년이라는 점 참고) 가족과의 생이별로, 우리가 익히 아는 그림 편지가 이때 시작됩니다. 1955년 1월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우연히 전시장을 찾은 정부 고위 관리가 벌거벗은 아이들의 모습을 예술로 이해하지 못하고 春畵로 매도하는 바람에 그림이 철거되면서 전시회는 풍비박산이 납니다. 이후 정신병 증세와 식음을 전폐하는 등 건강상의 문제를 겪다, 극심한 간염으로 서울 적십자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인 1956년 9/6일 사망합니다. 無연고자로 영안실에 보관되어 있던 시신을, 사흘 뒤에서야 이중섭의 사망 소식을 듣고 대구에서 한 걸음에 올라온 친구 구상 시인에 의해 화장되어, 유골 1/3은 서울 정릉에, 1/3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나머지 1/3은 후일 구상이 度日해 부인 남덕에게 전달되어, 그 집 뜰에 모셔집니다. 현재 대부분 남아있는 작품들은 1951년 피난 이후의 작품이며, 유화, 수채화, 크로키, 데생, 에키스트 등이 약 200여 점, 은종이화가 약 300점 이 남아있습니다. 책에 실린 편지는 300여 편중 일부가 실려 있습니다. 마흔이란 짧은 세월을 불꽃처럼 살다 간 분입니다.


강의는 1부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는 소달구지’, 2부 ‘울부짖는 황소화가 이중섭’으로 나눠 약 2시간 20분 동안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워낙 달변가인 데다 작품해설가라는 직업 자체가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능력을 요하는 거라 올해 들은 강의 중 최고로 기억되는 강의였습니다.


이중섭의 시그니처 그림은 황소와 群童(아이들 무리)화입니다. 두 아들과 떨어져 지내며 느끼는 그리움이 아이들 그림을 많이 그리게 된 배경입니다. “이중섭은 표현주의 화가로, 그림을 보기 보단, 그림 속에 감성을 표현한 것을 봐야 한다” 강조합니다.


이중섭은 사후 15년이 지난 ‘현대화랑’에서 1971년 열린 회고전 때부터 서야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고 고가에 매매되기 시작합니다.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된 <황소>가 35억 6천만 원에 낙찰되었고, 300여 편의 편지 중 한 장이 2002년 K옥션에 나와 1억 원에 낙찰되었는데, 경락받은 분이 베일에 가려져있다 그분 사후에 확인해 보니 故 이건희 회장 이었다고 합니다.


<달과 까마귀(1954)>에선 죽음보다는 희망을 담은 그림으로 해석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까마귀가 흉조로 인식되지만, 일본에서는 길조로 상징된다는 점, 일본에 떨어져 있는 가족들(태어나자마자 디프테리아로 사망해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한 큰아들을 포함)과 재회하는 날을 염원하는 희망이 담겨있다 해석합니다.


이중섭이 가족, 특히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읽은 사람의 마음을 내내 아프게 합니다. “아빠가 꼭 자전거 사줄게.” “오늘은 사놓은 종이가 한 장 밖에 없어 한 장만 그려 보낸다.”는 표현에서 생활의 궁핍함을 느끼게 합니다.

구상 시인의 가족을 그린 <구상네 가족(1955)>에선 자전거를 타며 환하게 웃는 아이의 모습이 한가운데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며 이창용 님은 가장 슬픈 그림이라 이야기하는데요. 사연을 듣고 다시 바라보니 공감하게 됩니다.


미술평론가이자 前 현대미술관장을 지낸 故 이경수 님은 “그린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섭에게 있어서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었다(224쪽)” 평합니다. 동경시절 유학생으로 만나 평생 절친이자 후원자 역할을 한 시인 구상(1919~2004, 이중섭 보다 세 살 아래)은 “중섭에게 있어 그림은 그의 생존과 생애의 전부였다(231쪽)” 한 줄로 그의 생을 요약합니다.


가슴 아픈 사연 하나. 배우자인 마사코(이남덕)님은 1921 생으로 2022년 101세의 나이로 작고 합니다. 1.4 후퇴 때 피난길에 데려온 유일한 조카 이영진이 이중섭의 회고전이 호평을 받은 이후인 1972년 이남덕 여사를 찾아가, 편지와 남겨진 작품을 자신에게 맡겨주면, 출판과 전시회를 열어 수익금을 드리겠다는 제안(사기)을 받아들인 이후, 단 한 점의 편지도, 남편 작품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2002년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개관 당시, 유일하게 보관 중인 중섭의 팔레트를 남덕 님은 기증합니다. 그러면서 “중섭이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쓴 편지, 거기에 자신이 답장한 편지를 돌려주시면, 그립고 꺼내 읽고 싶을 때 언제든 읽고 싶다며, 사후 반드시 반환할 테니 돌려달라”는 소망을 피력했는데,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卒한 사연을 접하며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에선 상설전시로 내년 2/1일까지 <이중섭 아카이브 전시 3부 : 1952~1954년>展을 진행 중입니다. 다음 주 제주 갈 일정이 있으니 이번 참에 이곳에 한 번 들러볼 생각입니다.


기회 되시면 이창용 도슨트의 강의를 들어 보시거나,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올해 86번째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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