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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terbreak Jan 26. 2023

첫 미팅, 드디어 나도 꽃길?

평온에도 메뉴얼이 있다면

나는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아무 곳에도 취직하지 않았다. 대신 돌연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되었다. 점점 추워지는 가을엔, 나를 ‘디자이너’라고 부르면서 혼자 일 한 지 8개월쯤 되는 날이었다. 작은 공모전으로 시작한 프리랜서 생활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내게 연락이 왔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곳이었기 때문에 나는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지었다. 내게 꽃길이 열리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어떻게 알았지?’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멋지게 일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담당자와 약속을 잡고 미팅장소로 내려갔다. 내게 일이 주어질지 아닐지도 모르는 채로 서울에서 용인까지 2시간을 이동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미팅장소에 도착해 긴장한 채로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이제껏 미팅은커녕 일반 회사 경험도 없었기에 기다리는 동안 다리가 떨렸다. 그때만 해도 직장인들이란 내가 아직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피곤한 눈, 바쁜 업무, 웃고 있는데 웃지 않는 표정… 당시 나는 이 일이 곧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미지의 세계에 사는 건 나였을 것이다. 미팅을 시작하며 노트북을 열 때 손이 덜덜 떨렸던 것을 기억한다. 추워서 그런지, 긴장을 해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들과 이야기해 보니 내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프로젝트에 대한 방향과 디자인과 같은 세부적인 내용에 관한 미팅이라기보단 다른 디자인 업체와의 가격비교를 위한 자리였다. 아마도 보고를 위해서였을 가격 해부는 미팅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었다. 그렇게 나는 순진하다시피 순수했던 마음도 같이 해부를 당한 것이다. 가격을 묻고 답하면서 겪은 적도 없는 경우의 가격을 즉석에서 매기게 되었다. 분명히 처음엔 추웠는데 나중엔 땀이 났다.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는 나를 앞에 두고 가만히 보고 있던 기 쎈 담당자의 눈빛은 의심에서 불신으로 변해갔다.


“계약서는 그럼 어떻게.. 쓰시나요?” 그가 물었다.

“여기에 준비된 계약서가 있으면 제가 확인하고 수정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아.. 계약서도 우리가 써야 하는구나…”


담당자의 업무량이 많아서일까? 일이 하나 더 늘었다는 불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회사 한번 안 다녀본 내 귀에는 그 말이 더 쓰게 들렸다.


그래도 나는 미팅을 성사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잘못된 노력이었다. 나는 최대한 즉석에서 대답을 하려고 하고, 내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미 숨길 것이 없어 투명옷을 입은 것 같았다. 나는 이미 디자이너가 아니라 물건을 팔고 싶어 하는 영업사원이었다. 그것도 잘 나가는 영업사원이 아니라 못 파는 쪽이었다. 그렇게 내 발목을 내가 잡으면서 식은땀을 흘리던 중 그 담당자가 내 포트폴리오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걸 만들려면 얼마나 들어요?” 그가 가리킨 건 당시 내가 한 것 중 가장 비싼 디자인이었다. 이유는 양이 많아서다. 그 사진은 디자인을 한 후 제품이 나오기 전, 마치 촬영을 한 것처럼 합성한 사진이었다. 이런 이미지를 '목업'이라고 부른다.


“그 디자인은 80만 원에 했는데, 디자인을 하고 나서 목업 이미지를 원하시는 분께는 3만 원에 만들어 드리고 있어요.”


“와… 그렇게 싸요?”


사람들의 놀라는 표정이 보였다. 표정들이 ’ 너, 그렇게 싸게 일해?’라고 말하는 듯했다. 체감 날씨가 더 추워졌다. 나는 내 가격이 너무 부끄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적절한 정보도 없이 가격을 모두 오픈했는지 모르겠다.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일의 규모와 범위에 따라 가격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집에 가는 길에도 그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아서 마음이 아팠다. 아무도 없는 길거리에서 "그래, 그렇게 싸다!" 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지금은 내가 초라해도… 이 가격에 계속 일 할 생각은 없거든'


억울했다. '내가 시작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어. 그래도 비전공자로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돈도 벌거든?’라며 나를 변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번다는 돈은 한 달에 50만 원 정도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라곤 하지만 세상의 눈으로 보면 나는 그냥 대학 졸업하고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미팅에서 느낀 부끄러움이 내 옷에 그대로 묻었다. 나는 집에 가는 길에도 나의 무지와 가격이 부끄러웠다. 나는 일을 하고 싶었고, 가격의 근거를 말하는 법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싸고 기준도 없는 디자이너 대신, 다른 모습으로 보이고 싶었다. 특색 있고 일 잘하는 멋진 사람으로 알아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한 번의 미팅으로 소소한 성과와 기쁨이 있었던 8개월이 초라한 날들로 규정당한 것 같아서 서글펐다.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엉엉 울면서 다짐했다.


“나 취직할 거야”





-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의 가격이야기

“이런 걸 만들려면 얼마나 들어요?”


가격이 정해지는 요인은 굉장히 다양할 수밖에 없다. 특히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는 창작한 그림의 ‘라이선스’ 개념이 있는데, 정석대로라면 같은 디자인이라도 제품의 생산 규모에 따라 다른 가격을 매겨야 한다. 중요한 건 ‘일의 범위(Scope)’와 ‘그 디자인이 쓰이는 사용처, 규모(Scale)’ 다. 거기에 실력이나 유명세에 따른 차이도 있어서 ‘이 디자인이 얼마인지’를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케이스마다,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가격을 공개적으로 오픈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처음 시작한다면 기본가만 오픈한 후 가격을 책정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받아 개별 견적을 내주는 것이 좋다. 그러면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는 고객들에게 하나하나 견적을 다 내주지 않아도 된다. 가격 비교만을 목적으로 무분별하게 문의를 넣어보는 고객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의 범위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까진 줄 생각이 없는 경우가 많다. 프리랜서라서 일의 안정성이 중요하다지만, 역시 ‘아무나 해도 괜찮은 일’보단 ‘내게 맡기고 싶어 한 일’을 하는 게 더 보람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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