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사람의 이야기
날씨가 맑아 주변에서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은 반갑다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 자리에서 나는 종종 듣는 역할을 맡곤 한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적당한 맞장구를 치며, 가끔은 깊이 공감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대화가 끝난 후 집에 갈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만 듣고 끝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정말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걸까?
한 번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말수가 적은 내성적인 사람도, 말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사람도, 결국은 자기 속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어쩌면 나도 말하고 싶지만,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익숙할 뿐인지도 모른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감정을 공감하며, 적절한 반응을 하는 것은 꽤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하나의 ‘역량’ 일지도 모른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만,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은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 듣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유난히 잘 들어주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들이 있다. 애인, 가족, 친구 중에도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듣는 것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신중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말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뿐, 그들도 결국은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표현을 나무에 비유해 보자. 어떤 사람들은 가벼운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작은 나뭇잎처럼 즉각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들은 그 순간의 감정을 말로 전하는 것이 익숙하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깊은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오랜 시간 감정을 내면에 쌓아두고 신중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결국 계절이 바뀌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 그들도 언젠가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진다. 잘 듣는 사람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똑같다. 다만, 그것을 꺼내는 방식과 시점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고 해서 ‘저 사람은 듣는 걸 좋아하는구나’라고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상대방도 언젠가는 자신의 감정을 꺼내고 싶을 테니까. 그리고 건강한 관계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아닐까? 한쪽이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고, 다른 쪽이 말하기만 하는 관계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결국 사람은 모두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고, 그 표현이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관계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무작정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말하고 표현하는 것에 신중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나처럼 신중한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듣는 역할과 말하는 역할은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관계가 오래도록 건강하게 지속될 수 있으니까. 소통이야 말로 관계의 본질적인 가치를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