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백시어터 퀴어 연극 <이건 이름없는 이야기야>
있지만 없는 존재들이 있다. 어떤 목소리들은 쉽게 지워지고 가리워진다. 그 불균형의 틈에서 찬란한 균열이 피어난다. 왁자지껄하게 소란피우고 발구르고 함께 노래하는 그 순간에 새로운 역사가 쓰인다.
Pride Month(프라이드 먼스), 매년 6월이면 개최되는 서울퀴어퍼레이드는 이제 15만명이 참여한다고 추산될만큼 대중적인 행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서울에서마저도 퀴어들이 제 존재를 일상에서 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하물며 서울이 아닌 지역의 현실은 슬프게도 더욱 요원하다.
대전 퀴어 연극 <이건 이름없는 이야기야>
그런데 바로 대전에서, 퀴어 당사자들의 이야기가 무대에 올랐다. 지난 8월 6일부터 11일까지 6일간 공연된 극단 ‘오토(Owtto)’의 연극, <이건 이름없는 이야기야>이다.
작품은 관객의 이야기를 배우와 연주자가 즉흥으로 무대에서 형상화하는 ‘플레이백시어터’ 형식을 취한다. 이번 공연을 앞두고 퀴어 당사자 관객들은 답할 수 있는 두 가지 질문을 미리 받았다. 정체성이 거부되거나 받아들여진 경험들, 그리고 사랑이 어려웠거나 지속된 경험들.
관객들이 보낸 사연 몇몇이 컨덕터 한은성 연출가의 발화를 통해 무대 앞에 읊어진다. 4명의 배우들은 진실로 ‘대본 없이’ 이야기를 무대 위에 그려낸다. 첫 사연이 읽히기 전 연출가는 자리에 앉은 관객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공연 워밍업 정도 될까.
관객의 하루를 묻기도 하고 공연에 대한 걱정 혹은 기대 따위를 묻기도 했다. 무엇을 기대하고 왔느냐는 물음에 한 관객의 대답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곳에 오면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진짜’ 이야기. 나와 너의 ‘진짜’ 이야기. 발화가 무대에서 짧게 상연되자 호탕하게 웃던 그의 심중을 알 수는 없지만 자연스레 ‘진짜’란 무엇일까 골몰하게 된다. 감히 생각해보건대 어쩌면, 숨기려해도 숨길 수 없이 북받치듯 터져나온 이야기는 아닐까?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야기들은 탄생하고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듣고, 전한다. 그중에서도 어떤 이야기들은 세상에서 좀 더 많이 발화된다. 곧 반대로 어떤 이야기들은 세상에서 좀처럼 말해지기 어렵다.
<이건 이름없는 이야기야>는 그 좀처럼 말해지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무대 위에 올린다. 쉽게 꺼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일까 오랜 시간 수없이 곱씹었기 때문일까, 관객들의 이야기는 다분히 고백적이다. 그래서 열렬히 살아있다.
사랑에 대해 물었지만 결코 사랑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아니, 하는 수 없이 사랑을 넘어야만 한다. 사랑은 ‘나’와 ‘너’의 관계임에도 퀴어들에게 그것은 응당 관계를 초월하는 세계와 늘상 부딪히는 행위인 탓이다. 그 충돌 앞에서 무너지고 견디고 맞서내는 형형색색의 이야기들을 4명의 배우들이 눈을 반짝이며 무대 위에 펼쳐낸다.
매일밤 무대에는 새로운 이야기가
작품이 공연된 6일 동안 매일 새로운 이야기들이 그날의 관객들과 만났다. 공연을 관람했던 8일 저녁에는 동급생 친구를 애타게 바라보는 고등학생 관객의 이야기와 사랑에 번번이 상처받고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관객의 이야기가 무대 위로 읊어졌다.
앞서 말했듯 작품은 관객에게 정체성이 거부당하거나 받아들여진 경험을 물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실상 적지 않은 퀴어들은 거부당하거나 받아들여질 수조차 없이 정체성을 숨긴 채 살아간다. 꽁꽁, 마음이 사그라들길 바라면서, 접고 구기고 찢어내며 마음을 숨겨낸다. 고등학생 관객 역시 그러했다.
드러내는 순간 어떤 표정을 마주해야할지, 아니 어떤 표정을 마주할 수 있을지 상상만으로 마음이 아득해지니까. 그래서 사연을 보낸 이는 그저 ”상상만 한다“고 말한다. 결코 말할 수 없어서, 다만 상상하는 것 하나는 자유라서.
꺼내놓지 못할 지언정 아름답게 반짝이는 마음이 끝내, 가족 앞에서 생채기를 입는다. 그럴 줄 알면서도 설핏 드러내본 ‘진짜’ 마음에 날선 반응이 돌아온다. “동성애 그런거 (...) 울렁거린다”고.
나의 집, 나의 뿌리, 나의 사랑이 나를 붙잡아 흔든다. 수많은 말들을 삼킨다. 어떤 삶이 까맣게 사그라든다.
이어 어떤 장면을 보고싶으냐고 물었다. “우주가 너를 외면하더라도 사랑해”주는 장면을 상상했노라 답한다. 무대에서 상상은 곧 실제가 된다.
“온 우주가 너를 외면하더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외치며, ”너는 참 많은 사랑을 품고 있구나“ 다정하게 전하며, 웅크린 이를 온 몸으로 끌어안고 그 마음들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사랑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그 끝에는 치유가
무대를 보는 내내 단 하나의 문장이 파도처럼 몰려와 마음에 부딪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의심하고 밀어내봐도 하는 수 없이 사랑이다. 외면받고 다치고 무너져도 끝내 끄덕일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오롯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이기에 애써 눌러 참아내도 비집고 터져나오고야 만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번번이 아름답다. 모든 것이 ‘유용’으로 환산되는 세상에서, 감히 값을 매길 수 없고 잴 수도 없이 그저 사랑한다는 것. 대가 없이 누군가의 빛나는 순간을 잡아채고 깊이 기억한다는 것. 타자인 내가 그로써 생동하고 또다른 빛을 내고야 만다는 것. 그 얼마나 찬란한 일인지.
우리네 현실은 슬프게도 냉담해서 그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담을 그릇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퀴어들의 이야기는 곳곳에서 피어나고 있다. 이야기들이, 사랑이 지속될 수 있도록, 플레이백시어터는 ‘치유’한다. 관객 한 명의 ‘이름 없는 이야기’는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무명(無名)의 곳에서 모든 이들이 명명(命名)된다.
아픔들을 끌어안고 우리는 사랑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한다. 저마다의 이야기 속에서 관객들은 하염없이 울고 또다시 미소짓는다. 배우들이 불어내는 방울방울의 이야기들이 관객들의 삶과 만나 터지고, 녹아들고, 새로운 빛을 만들어 낸다.
애정어린 눈길로 서로를 마주하는 속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무지개빛으로 쓰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