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장이정수 선생님을 떠나보내며
한 생이 끝났다. 삶의 귀천을 따질 수는 없지만 특별히 두루 사랑받던 이의 생이 끝이 났다. 그의 가는 길을 배웅하러 수많은 이들이 귀한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 긴 행렬이 이어졌다. 모든 이들이 슬픔에 잠겼다.
사람들에게 소식이 닿은 첫 날, 빈소를 찾은 이들은 그 황망함을 온 몸에 휘감고 있었다. 북받친 감정을 어찌할 줄 모른 채 한 걸음에 달려온 이들도, 이미 한바탕 울음을 흘려보내고서 담담하고도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온 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끌어안았다. 마주치는 눈길 속에 와락, 긴 말 하지 않아도 진한 감정이 배어나왔다.
선생님과 나의 인연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도리어 그래서 사무침이 깊었다. 특히 어리고 힘없는 활동가들에게 누구보다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던 그와, 더 많은 말들을 나누지 못한 것이 사무치게 슬퍼졌다. 조금, 조금만 더 우리에게 시간이 있었더라면.
허나 수년, 수십년 동안 진한 인연을 나누었던 동료들이 그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말들을 전할 때면 감히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앞이 캄캄해지곤 했다. 추모식은 그 이들의 마음들로 한 시간을 빼곡하게 채웠다.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더, 더 많이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시리게 내뱉는 그 말들에 눈물은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선생님은 온 마음을 다해 세상에 사랑을 베풀었고 또 사랑 받으셨구나. 세상과 길지 않았던 인연이 원통하지만 그 누구보다 진하게 삶을 살아내셨구나. 슬픔과 존경과 경이 같은 것들이 요란하게 뒤섞였다.
대학 시절, 어느 수업시간 배운 장자의 말을 제법 오래 품고 지냈다. 삶과 죽음은 사계절의 변화와 같아서, 삶이 동시에 죽음이고 죽음이 동시에 삶이라서, 우리는 죽음에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그 말이 절절하게 마음에 남았었다.
엄마와도 같았던 할머니를 몇 년 전 떠나보낸 일이 마음에 아프게 남아있었지만, 그 말들로 어쩐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이별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였음을, 그리고 아직 삶 속에 있는 우리네 존재들과 어쩌면 그리 멀리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했다.
물론 때이른 죽음을 온전히 자연스러운 죽음과 같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과연 온전히 자연스러운 죽음이라는 것이 있을까, 하고 떠올려본다. 앓는 시간 속에 조금은 짧은 생을 사셨던 것이 같이 호흡했던 존재로서 하는 수 없이 통탄스럽지만, 이 작별은 그가 살아온 삶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흘러온 것을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 자연의 이치와 하나 되어 곧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설사 육신을 아프게 할지라도 그 자체로 대자연의 품 속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선생님의 뜻이라면 사사로운 슬픔의 감정들을 한켠에 두고 그의 ‘무위’를 받아들이고픈 마음이 피어오른다.
아직은 슬프지만 많이 슬퍼하지 않을게요.
그저 당신께서 흘러가셨던대로,
사는 중에 심은 씨앗들을 잘 가꾸고 돌볼게요.
고 장이정수 선생님,
이제는 평안히 잠드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