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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정 Jan 07. 2023

[서평] '이미 중심인 것'을 중심으로

서이제의 소설 <두개골의 안과 밖>를 읽고


9,751,XXX.


구백칠십오만천…. 무엇을 의미하는 수일까? 지난해 10월 한 달 동안 도축된 닭의 숫자이다. 엄밀히 말하면 도축된 닭을 세는 단위는 ‘천수’로, ‘9,751천수가 도축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XXX에 담긴 백 단위 수의 닭은 하나의 죽음으로조차 세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치느님’을 예찬한다. 월드컵 축구 경기가 예정되어 있는 오늘은, 과연 얼마나 많은 닭들이 ‘단지’ 살점이 되어 식탁 위에 올라갈까.(이 글은 12월 3일 포르투갈전을 앞두고 쓰여졌다.) 도살되어서야 신격화되지만 죽는 순간조차 세밀한 수로 기록되지 못한다.


한편 또 어떤 닭들은 세려는 노력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도축되기 전에 생을 마감하는 닭들이다. 인간의 ‘먹이’로 생장시키기 위해 유전적으로 성장이 빠른 닭만을 남겨온 결과, 그리고 성장촉진제를 항시적으로 주입해온 결과, 닭들의 뼈는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주저앉는다. 생명이 아닌 재료로 취급된 탓에 사육장의 밀집도는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수준이다. 그 결과 닭들은 늘상 근골격계 질환과 피부병에 시달린다.


정도가 극에 달해 한 개체의 성장이 사료의 경제적 비용을 충당해주지 못할 때, 그들은 어김없이 '폐사처리'된다-죽임을 당한다.- 닭 이외에도 인간의 ‘고기’가 되는 동물들, 특히 소와 돼지의 여건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오로지 값으로 환산되는 상품이기에 사육장은 경제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상태로 유지된다. 인간은 잠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악취가 진동하는 곳이다.


누가 인간에게 이러한 자격을 주었을까? 입맛대로 유전자를 조작하고 상품으로 치환시켜  존재 내의 질서를 망가뜨릴 자격을 어느 누가 인간에게 주었을까.



서이제의 단편소설 <두개골의 안과 밖>은 두개골, 즉 인간 이성의 바깥을 상상함으로써 이러한 인간중심적 세태에 묵직한 질문을 던져낸다. 형식면에서 다소 실험적이나 실험성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고 주류 관념을 해체하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된다.     


소설 속에서 ‘새’, 까치는 오늘날의 도시 비둘기가 그러하듯 ‘유해동물’로 여겨진다. 개체 수가 급증하여 인간의 식량, 농작물을 ‘감히’ 훔쳐먹기 때문이다. 두(頭)당 값이 매겨져 탕, 탕, 탕-, 까치 사냥에 많은 사람들이 매달린다. 까치들은 갈 곳을 잃는다. 둥지를 지을 곳을 찾아헤맨다.


터전을 찾아 헤매는 까치들의 모습이 인간들의 모습과 교차된다. 건물 공사 인력에 투입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나이를 불문한 수많은 인간들이 이른 아침 길거리를 서성인다. 건물은 단지 한 줌의 다른 인간들을 위한 공간이다. 한 줌 밖의 인간들은 갈 곳을 잃는다. 도구로 쓰일 곳을 찾아헤맨다.


어떤 인간들은 또다른 현장에 투입된다. 조류 바이러스가 번진 농촌에서, 살아있는 그러나 ‘바이러스에 걸릴지도 모르는’ 닭들을 땅 속에 파묻는 일이다. 닭들의 비명이 고막을 찢을 만큼 울려대지만 이를 비추는 방송 화면에는 모자이크된 화면과 음소거된 무음(無音)만이 흘러나온다.


사냥당하는 까치, 일거리를 찾는 인간, 매장당하는 닭. 이들은 짧은 단락으로 계속해서 교차되며 서술된다. 그 교차점에는 ‘이성-중심주의’가 있다. 까치가 농작물을 파먹는 것은 인간들이 살포한 살충제가 ‘해충’을 박멸한 탓에 먹을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농작물이 귀해진 것 역시 인간들이 초래한 기후변화 때문이다. 닭들이 매장당하는 것은 닭들을 유전적으로 획일화함으로써 바이러스에 취약하도록 만든 인간들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가 아닌 ‘이성중심주의’라 부르는 까닭은 이 모든 이야기의 폐해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초래되기 때문이다. 인과관계의 끝을 부러 헤아릴 필요도 없이 이미 ‘대부분의’ 인간들은 피해의 현장에 놓여있다.


‘유해동물’과 인간, ‘고기’와 인간의 간극에는 ‘이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성(理性), 합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이른다. 서양에서 근대가 태동하면서부터 이성을 잣대로 인간과 세계가 구분되기 시작했다. 그로써 인간은 유구한 우주의 역사 이래 자신이 자리잡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유일한 종족이 되었다.


이성이라는 단어에는 인간만이 합리적으로 사고한다는 견고한 오만이 녹아있다. 인간은 수천리 떨어진 곳의 냄새를 맡을 수도, 하늘을 날 수도, 깊은 바다 속을 헤엄칠 수도 없는, 고작해야 얇은 피부를 가진 연약하디 연약한 존재임에도 ‘사유할 수 있음’을 중심으로 두고 여타 모든 존재들을 밟고 선다.


이는 ‘이미 중심인 것’을 중심으로 함으로써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착취하는 것 역시 가능하게 했다. 누가 사는지도 모를 아파트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동안 그 아래에서 다른 인간들이 고통을 분담하는 것과 같다. '덜 이성적인' 인간들은 '유해동물'과 다를 바 없어진 것이다.



소설은 현실과 상상을 오묘하게 조합해내고 있다. 현실과 현실 사이에서 '인간들이 증발한다!' 집에 있던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새만 한 마리 남겨져있었다는 제보가 빗발친다. 인간이 ‘새인간’이 되었다는 소문 역시 입에서 입으로, 손에서 손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간다.


소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새인간’이 되기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세어지지 않는 닭들은 계속해서 구덩이 속으로, 구덩이 속으로 파묻히고 있다. 그때 누군가 의문을 제기한다.

“왜 사람들은 ‘새인간’이 되기를 두려워할까요?”


어쩌면 이들이 두려워한 것은 인간들에게 혐오받는 ‘비인간’이 되기를 두려워한 것일까? 아니- 그러니까 ‘인간성’의 박탈이었을까? 하나의 존재로 세어질 권리가, 여타 존재들을 함부로 뭉뚱그릴 수 있는 그 '권리'가 박탈당할까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


또 어쩌면, 이미 어떤 인간들은 '유해동물'과 다를 바 없어진 세상에서 그 '다름'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던 실존주의적 발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작가는 '새인간'의 존재를 통해 그 경계의 희미성을 고발하고자 한 것일테다.  


이야기 밖 우리는 실상 작가의 상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이례적인 폭우에 반지하에 살던 장애인 일가족이 참변을 당했고, 단지 걸어가다 맞닥뜨린 참혹한 죽음에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있다. 감염병이 전세계를 강타해 모든 일상을 마비시켰지만 단지 '폭탄'을 들고 있었을 한 국가를 비난하며 오늘도 ‘치킨’을 시켜먹는다.


우리는 이 현실에서 ‘새인간’ 대신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을까. 눈앞에서 목도하는 기후위기, 숨을 막히게 하는 터전의 오염, 결국 인간에게 닿아있을 생태계의 붕괴가 아니라,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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