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에세이 <레퀴발렁(L’EQUIVALENT)>
이방인의 감각은 삶을 집어삼키고야 만다.
한 생명이 새로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한 줌의 땅과 물과 바람이 필요하듯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생이 시작되는 터전을 갖는다. 그 터전은 때때로 그로 하여금 ‘나’를 인식하는 거울이 되어 존재의 일부를 구성해나간다. 터전은 끝없이 고정불변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 다른 형상이 되어있기도 하고 어느 순간 유약하거나 단단해져있기도 한다.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터전의 부재를 경험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존재 조건의 결핍을 경험하는 일이며,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존재로서 실존적 위기를 맞닥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 따위의 형용 모순에 잠식된다. 그래서 이방인의 감각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강렬하다.
영화 <레퀴발렁(L’EQUIVALENT)>은 감독이 코로나19 시기 프랑스에서 아시아 여성으로 살아가며 마주했던 이야기들을 친구들에게 전하는 편지 형식을 빌려 풀어내는 일종의 ‘다큐에세이’이다. 한 편의 이야기 묶음을 읽듯 나지막이 깔리는 나레이션 위로 연관되거나 연관되지 않는 이미지들이 감각적으로 중첩된다.
이미지들은 주로 ‘응시’된다. 적막이 감도는 봉쇄의 시기,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감독이 응시’했던’ 것이거나, 고통스럽게도 섞일 수 없는 공간 속에서 응시’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응시함과 응시됨 그 사이에서 일상적 투쟁은 무한히 반복되며, 특히 응시됨의 거부불가능성은 응시하는 존재로서의 주체성과 번번이 충돌하며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 모든 것에 반응하면 살아갈 방법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서 “침묵”, 한다. 그렇게 침묵이 쌓여가는 동안 응시함과 응시됨 사이의 모순적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그 틈새 어딘가 상처는 고약하게 짓무른다.
때로는 누군가 미소지으며 말을 건넨다. “당신, 프랑스어 잘하시네요.” 선량함을 가장하고서 ‘네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님’을 직설하는 순진성 앞에 이방인은 일종의 무력감을 경험한다. 그 앞에 우리가 과연 어떤 말을 더할 수 있을까.
영상 속에는 크리스마스 즈음의 장면들이 적잖게 등장한다. 그 곳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터전’으로 돌아가는 때이면서 그래서 가장 환상적으로 체현되는 시간일테다.
일종의 ‘정상성’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보이며, 그 압도하는 이미지 속에서 사람들은 실제 경험하는 행복과 무관하게 ‘행복해야’ 한다.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그때만큼은 나의 신체를 기꺼이 이미지의 제물로 내어주고 만다.
‘정상성’의 무한대적 확장 앞에서 필연적으로 이방인은 발 디딜 곳을 잃는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 속 크리스마스 이미지들에 대한 응시는 특별하다. 이미지에 삼켜지지 않은 몸을 가지고 또렷하게 응시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이미지가 가진 모순성과 폭력성을 강력하게 드러내보인다.
평화로운 이미지를 응시’하며’ 은폐된 존재로서 평화롭지 않은 나 자신을 발화해낼 때 그 사회의 이미지는 한 풀 벗겨진다. 담담하고도 단단하게, 그 폭력들을 고발해낸다.
이방인의 감각은 고립감 또는 그래서 연결감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끊임없이 응시당하는 순간들이 번번이 이방(異邦)에 나홀로 내던져져 있음을 인식하게 하지만, 그를 일순간 잊게 만드는 연결들이 다시 한 번 응시하는 존재로서의 삶을 살게 만든다.
영화 속 어느땐가 소개되는 이야기가 있다. 한 이방인 친구가 떠나온 곳에서는 크리스마스 전 날 저녁,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이를 위해 ‘빈 자리’를 마련해둔다는 것이다. ‘빈 자리’는 새롭게 찾아오는 이에게 ‘꼭 맞는’ 자리가 된다.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 것처럼, 원래부터 내가 있었던 자리인 것처럼. 비로소 그 곳에는 이방인이 없다.
그렇게 이방인은 ‘이방’과 무관하게 만들어지고 또 사라진다. 어느 곳에서는 모두가 이방인이되 어느 곳에서는 누구도 이방인이 아니다. 그리고 누구도 이방인이 아닌 곳에서야, 더 나은 삶의 총체는 훨씬 더 커진다. 우리는 그러한 곳들을 더 적극적으로 상상해야만 한다.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삶을 넘어 모두가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만 한다. <레퀴발렁>이 던져내는 물음은 은연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이방인에게 필요한 것은 공허하도록 다정한 말도 열렬히 환호되는 맞이도 아닌, 단지 그 조금의 빈 자리가 아닌가 하고.
“어떠한 바람도, 판단도 없이
이웃에게 다가갈 수 있는 당신의 다정함만이
착취와 억압의 역사를 써 내려간
탐험가의 시야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