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리 Jan 21. 2024

자존감을 위해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23년 연말부터 긴 집안 청소를 시작했다.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청소가 아니다. 집안 곳곳의 서랍들을 모두 뒤지고, 아련하게 쌓여있는 책들의 먼지들도 다 털어내고, 집안 곳곳의 그늘에 숨겨진 잡동사니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정리하는 대대적인 집안 내면 개조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나의 청소는 서두르지 않고, 꼼꼼하게 계속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이 기나긴 청소의 시작은 그랬다. 적지 않은 돈을 주고 화이트톤으로 싹 고치고 들어온 이 집. 겉은 번지르르하고, 누가 봐도 깔끔한 이 집. 매끈하게 하얀 서랍장을 열어보면, 유통기한이 지난 영양제, 언제 산지도 모를 옷들,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잡동사니들이 가득하다. 이 집을 이루는 그 많은 것들이 정신없이 흩어져 있었다. 꼭 나 같이 말이다.

 물론 청소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릇을 닦고, 청소기를 밀고, 세탁기를 돌리고. 하루하루 쌓여가는 감정의 청소더미를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청소를 하긴 했지만, 그건 그냥 보기 싫은 것들을 서랍장에 가둬두고, 지금 당장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사소한 것들을 씻어내는 것에 불과했다. 처박아 두고 닫아버리면, 남들은 모를 그럴듯한 내가 생기는 것이다.


"저를 우습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제가 다른 분들에게 어떻게 보이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이런 식으로 제 자존감을 갖는 편이에요. 남한테 보이는 자동차, 옷, 구두, 액세서리 이런 것보다도 제가 늘 베고 자는 베개의 면, 내가 매일 입을 대고 먹는 컵의 디자인, 매일매일 내가 지내는 내 집의 정리 정돈, 여기서부터 자존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정돈되고, 그런 것들로 매일을 채워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나 자신에 대한 자존이 쌓여서 내가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 나한테 맡겨지는 일, 모든 것을 정말 예쁘고 퀄리티 있게 잘할 수 있게 돼요. 결국에.  

<홍김동전> 홍진경 말 중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남들을 웃기는 예능인 또 큰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 착하고 단단한 딸을 키우는 엄마 홍진경의 말이다. 그녀의 자존이 시작되는 곳은 바로 여기였다. 나를 위한 공간, 남들이 보지 못하는 나를 위한 것들을 정리하고 소중히 여기는 그 행동과 마음. 그렇게 매일매일을 채워나가다 보면, 나를 내세우는 일이 자랑스럽고, 잘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결국에. 결국에 말이다.



재작년 퇴사 면담 때가 생각난다. 주저리주저리 퇴사를 하는 마음을 평소 언니같이 고마운 팀장님께 털어놓다 보니 울컥했었다. 거기다가 팀장님의 한 마디에 미칠 듯 머리가 울렸었다.  


"현진 님은 필요 이상으로 정직해요. 남에게 관대한 만큼, 자신에게도 관대해질 필요가 있어요.'


 그렇다. 나는 자존감이 썩 높지 않다. 자존감의 원천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타고난 것 같지도 않고, 칭찬에 인색했던 부모님의 밑에서 자존감이라는 것의 존재를 그 가치를 알지 못했다. 다행히 어른이 되어 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너그럽고 고마운 주변사람들이 많아, 내게 잘하고 있다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말해준다. 사실 그 말이 고마우면서도 부끄럽다. 매번 나는 나에게 물어보고, 걱정한다.  


'정말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사람들이 내 서랍장의 문을 열어본다면 실망하지는 않을까?'


  겁 없이 시작한 이 청소가 언제 끝이 날지는 모르겠다. 긴 시간을 그렇게 뒤죽박죽 쌓아두고 있었으니, 다 꺼내어 하나하나 정리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깊은 서랍을 열어내고 의심 없이 청소를 시작해보려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쟤는 뭐 하나 싶겠지만, 주변인들의 눈치를 벗어나서 나는 나만의 속도로 빗자루를 쓸고 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