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보세난에 꽃대가 올라와 있었다. 베란다에서 찬 기운 견디고 당차게 올린 꽃대는 부화하기 직전의 숭고한 모습으로 둥지를 틀었다. 화한 백학이 되고, 코끝 아릿한 향기의 홍학이 되어 날개를 펼칠 그 자태를 상상하며 마음이 먼저 꽃을 피웠다. 밤낮으로 들여다보고픈 욕심이 앞서 난 분 세 개를 거실로 옮겼다.
십여 년도 넘었을 게야, 친구 집에서 한 줄기 얻어 온 타이거베고니아는 저희끼리 엉덩이를 비비면서도 잘 자라주었다. 여기저기 분양해 주었는데도 무성하여 해마다 꽃대를 올리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인다. 난초 옆에 타이거베고니아를 겹살림하니 모양새가 어울린다.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다. 설 전날, 장롱 위에 올려 둔 비상금을 꺼내려다 받침대가 기우뚱하여 넘어지신 것이다. 손자들한테 줄 세뱃돈은 장롱 위에서 쿨쿨 게으른 잠을 잤다. 어머님은 온화하고 매사에 긍정적인 분이라 차도가 빨랐다. 병원에 계시니 더운밥에 세면장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 되레 시골에서 겨울을 지내는 것보다 편하다고 하셨다.
옆 병상에 할머니 한 분도 같은 날 입원을 하셨다. 설 준비하느라 바쁘게 일하다가 넘어졌는데 엉덩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며느리들은 직장 생활하느라 바쁘다며 아들들이 차례로 다녀갔는데 내 손길을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한 옴큼의 짚단처럼 가벼웠다. 병상에 누워서도 집안일을 걱정하였고 식사도 거의 하지 않으셨다. 어느 날부터인가 할머니는 정신 줄을 당겼다 놓았다 하시며 겹겹 말아두었던 지나간 시간을 횡설수설 풀어내고 있었다. 집으로 가야 한다며 몸을 일으키다가 수술한 엉덩뼈가 어긋나 침대에 묶이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다.
추운 날 몸져누운 두 할머니, 허리 굽은 떡갈나무처럼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산골 마을에 뿌리 내린 두 분은 형광등 불빛 아래 각각의 표정을 짓고 계셨다. 어머님은 TV 연속극에 귀를 여시고, 할머니는 내가 읽어 주는 잡지 속의 글귀에 귀를 여셨다. 한참 책을 읽다가 돌아보면 하얀빛을 쏟아내는 형광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도토리 굴리듯 데구루루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는 창백하게 시들어 갔다.
거실로 옮겨온 난초는 겉보기에는 탈이 없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꽃망울이 말라서 배배 틀어지는 게 아닌가. 물을 뿌려주고 영양제를 주었는데도 기어이 꽃망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말았다. 자신이 자라던 환경이 아니라고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와 반대로 타이거베고니아는 따뜻한 거실에서 꽃대를 힘차게 올렸다. 화드득 무리 지어 피어난 흰 꽃은 떼 지은 참새처럼 무수히 날개를 퍼덕였다. 검붉고 두툼한 잎사귀가 건강함을 과시하며 화사함보다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어머님은 두 달간의 병원 생활을 마쳤다. 업혀서 들어갔던 병원문을 걸어서 나오셨다. 군위 한밤마을 홍씨댁 맏딸로 아버님께 시집올 때는 고운 꿈을 꾸셨겠지. 그러나 운명은 얄궂어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사십 대 후반에 남편 여의고 어린 육 남매 바라보며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슬픔에 잠 못 이룬 날이 하루 이틀이었겠는가, 어머님은 둥지에 있는 새끼들을 돌보아야 했기에 그 힘든 현실에 대처하는 나름의 방법을 익혔을 것이다. 스스로 아름다운 꽃이길 포기하고 환경에 적응하는 강인한 들꽃이 되기를 자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담담하게 병원 문을 나서는 어머니 눈길에 같은 병실의 할머니 걱정이 물컹거렸다. 완전히 정신 줄을 놓아 버린 할머니는 불편한 몸을 뒤틀며 허공에 휘휘 손을 저었다. 날고 싶은 게야, 훨훨 날아서 집으로 가고 싶은 게야. 끝내 그 새는 이승에서 날개를 펼치지 못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
빛살 속에 새들이 날아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지난해의 그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다시금 보세난 두 개의 분에서 꽃대가 올라온 것이다. 욕심부리지 말자고 마음먹으며 틈틈이 베란다에 나가서 꽃망울을 들여다보았다. 연둣빛과 갈색빛의 날개를 펼친 모습이 고고하다. 난 옆집에는 여전히 베고니아가 살림하며 올망졸망 참새 눈알 같은 꽃망울을 달고 이웃 간의 정을 나누고 있다.
오늘, 베란다에 꽃향기 분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