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라는 공간은

사람을 어떻게 변하게 할까

by 권권우

전역을 하고 약 6개월이 지난 뒤에, 처음으로 예비군 훈련이란 것을 가야 했다. 당시 복학 첫 학기를 보내며 한창 다시 학교 생활에 적응 중이었는데 갑자기 또 군대로 가게 되니 느낌이 묘하더라. 당연히 유쾌하진 않지만 또 마냥 싫지만은 않은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그때까지는 사회보다 군대가 더 익숙한 공간이었으니까.(지금은 전혀 아니고, 그냥 가기 싫어 죽겠는 것이 예비군이다)

안내 사항을 천천히 읽어보다 보니 복장 규정에 전투모라는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전투모라는 단어를 보니 자연히 전역모가 생각났고, 그 전역모라는 것에 얽힌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아직까지 꽤나 많은 부대에서 전역하는 병사들에게 전역모를 해주는 전통이 남아있지 싶은데, 그게 막상 예비군을 갈 때는 꽤나 부끄럽고 낯 간지러운지라 이 전역모를 그대로 쓰고 예비군을 가도 괜찮냐는 질문은 예비역 1년 차들에겐 흔한 것이다.

나는 전역모를 받지 않았다. 내 선임들한테 해줬던 기억을 더듬어보고 다른 소대 선임들이 전역할 때 애들이 해주는 걸 보면서 느낀 첫 번째 이유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 물건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는 낯간지러운 게 싫다. 부끄럽게 군 생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축하받을 일을 하지도 않았다. 그곳에서 나오는 것만으로, 그리고 거기서 만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내 전역 축하는 과분했다. 그래서 그냥 안 받겠다고 거절했고, 나는 70일 간의 말년 휴가를 보내고 전역 대기를 하러 돌아왔다.

그러나 상황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나름 좋은 마음으로, 준 게 없으니 받지 않겠다는 양심에 입각하여 내린 내 결정이 이상한 방향으로 좋지 못한 영향을 주더라. 우리 중대에서는 아직 전역자에게 전역모를 주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전역모 없는 내 전역식이 나의 동기 라인 병사들에게는 꽤나 충격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들이 내 소대 후임들을 안 좋게 보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후임들 잘 챙기고도 뒤통수 맞은 불쌍한 피해자라도 된 양 화를 내는 그 친구들의 모습이 심히 당황스러웠다. 뭔가 심각한 사건이 생긴 것은 아니다. 요즘 군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오히려 선임들이 후임 눈치를 보는 실정이니, 마음에 안 든다고 별 수 있나.

다만 내 결정은 좋은 마음에서, 나름대로 그 친구들을 생각해서 내린 것이었는데 오히려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서 썩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이미 전역식 끝나고 말년 휴가 보내는 중인 사람이었으니까 부대 분위기에 개입할 위치도, 그럴 마음도 아니었어서 뭘 한 건 없지만.

이 일은 내 별 볼일 없는 군 생활 중 기억에 남는 몇 안 되는 사건 중 하나다. 군대라는 공간의 특수성 때문인지 몰라도 나름 교훈을 얻었다. 좋은 마음으로 한 일이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막연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던 사실을 직접 겪어봤으니.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웬만하면 그땐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그대로 할 거라고 대답하겠는데, 이건 잘 모르겠다. 내 만족만 생각한다면 그대로 안 받겠다고 할 텐데, 다른 친구들까지 생각하면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걸 받을 테니까 해달라 하는 것도 딱히 걔네를 위한 것이 될지 모르겠단 말이야. 솔직히 되게 적극적으로 해주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되게 적극적으로 해준다 했어도 거절했겠지만.


군대라는 공간이 가진 그 특수성은 정말 사소한 부분에서 예민하고 속 좁게 만든다. 누가 나에게 인사를 대충했다는 이유로, 누가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신발을 꺾어 신고 다닌다는 이유로 군대 안의 사람들은 큰 모욕이라도 당한 양 화를 낸다.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본다면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인데, 왜 그때는 그게 그렇게 눈엣가시처럼 거슬려 죽을 것 같았을까.


자유의 통제 속에서 인간은 괴물이 되나 보다. 아니 원래 괴물이었는지도 모르지. 아니 어쩌면, 원래 인간은 괴물일 수도 있어. 나도, 당신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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