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재로 변한 아버지...
화장 자체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몸에 지방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말랐었다. 화장 종료가 뜨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 니 아버지, 바짝 말라서 화장도 빨리 끝나는구나."
아버지는 말년에 척추 협착증을 오래 앓으셨다. 연세 때문에, 그리고 허리 수술을 말리는 지인들(해도 효과 없다, 재수술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로 운동과 물리치료, 약물 치료로 고통을 덜하셨음 했지만, 아버지는 몸이 극도로 안 좋아진 몇 년간을 거의 방에 누워 TV 보는 낙으로 사셨다.
그나마 코로나 이전에는 어머니의 성화로 가끔 마실도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도 했다. 그런데 70살 넘은 노인이 할 수 있는 알바가 뻔한 것 아닌가? 젊은 애들도 일거리가 없어서 노는 데 그 나이에 무슨 일을 하려고 하냐고? 연금 없어? 그 나이 먹도록 일할 정도로 돈도 없이 뭐 했어? 이런 질문하지 마세요. 요즘은 재수 없으면 인간이 120살까지 살 수 있는 세상이랍니다.
이 나라는 20대만 국민인가 봅니다. 노인을 위한 정책은 자고 일어나면 나오는 수많은 청년 청소년 관련 정책에 비해 거의 손꼽을 정도로 새발의 피. 노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갈음하고 장례 이야기가 끝나면 나중에 다시 거론하도록 하겠다.
아무튼 아버지는 잡다한 소일거리도 없으면 우리가 다니는 인천 용화사에 가서 점심도 드시고, 사찰에서 시간을 보낸 뒤, 서너 시쯤 집에 오시는 등 외출을 했다. 2019년 터진 코로나 이후, 모든 세계인의 외출과 모임이 금지되거나 마비되자, 자의 반 타의 반 아버지는 방구석 생활을 시작했다. 빌어먹을 코로나. 코로나 19만 아니었다면 아버지가 좀 더 사셨을까. 가끔 이런 생각도 든다. 무기력은 사람을 더욱 병들게 하지 않나.
당시, 아버지가 가장 즐겨보던 프로그램은 일본 시리즈인 <고독한 미식가>였다. 아버지는 이 프로그램을 보고 또 봤다. 누워만 계시는 아버지를 보며 방에서도 가벼운 체조라도 하시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아마 드라마 주인공처럼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맛집 여행을 하고 싶으셨겠지.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셨을지도. 아버지는 한 곳에 특히 실내에 가만히 있는 것을 못 견뎌하시는 성격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한 적십자 봉사는 중년까지 하시면서 봉사 겸 여행 겸 팔도강산을 유랑하셨더랬지.
아버지가 떠나신 후, 왜 '연락'을 안 했냐며 '입으로'만 위로를 건넨 친척이나 지인 등 사람들이 하나 같이 같은 비슷한 이야기 했다. 아버지가 생전 봉사 활동을 많이 하셨고, 남의 궂은일에 몸 사리지 않고 나서서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라고. 그래, 그 말 하나로 됐다.
아무튼, 두 시간 정도 걸린다는 화장은 한 시간 반 정도 되자, '냉각 중'으로 글자가 바뀌었다. 그리고 화장 완료라는 글자가 뜨기 전, 우리는 장례지도사가 이끄는 대로 밖으로 향했다. 거의 끌려다녔다는 표현이 정확할 듯.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세 가족, 큰 외삼촌, 그리고 오빠 친구 한 명.. 이렇게 다섯 명이 행렬의 전부였다. 새벽부터 제주도에서 올라온 친구 분은 비행기 시간 때문으로 화장 중 가셨고, 나머지 운구 인원은 점심 식사 후 모두 회사로 복귀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남아준 그 친구 분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린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집이 분당 쪽이라서 그냥 있었다고 하시던데... 아마 갈 타이밍을 못 찾았거나, 빠지면 너무 티가 날 정도로 사람이 없어서 뻘쭘했을 수도 있었을 테고,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우리 가족이 안쓰러워서 못 가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사람이 없는 장례식장에서는 섣불리 인사만 하고 나오는 게 참 눈치 보였으니까. 어떤 이유였건 그때는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내가 영정사진을 들고 맨 앞에서 몇 안 되는 우리 행렬을 이끌고, 치렁치렁하게 긴 상복 치마 때문에 혹여 넘어질까 봐 장례 지도사가 뒤에서 내 허리춤을 잡아주셨다. 이동 중 잠시 장레지도사에게 물었다. 다음과 같은 두 마디 대화 후, 우리는 말없이 긴 계단을 내려왔다.
" 나 : 영정 사진을 맡상주가 들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 장례지도사 : 영정 사진을 맡 상주가 들면 고인이 뒤돌아 보며 못 떠나십니다...
"나 : .....
화장 종료를 알리는 방송이 나온 후, 화장이 끝난 아버지의 유골이 젊은 여직원과 함께 통유리 안에서 보인다. 세상에... 회색 가루들과 함께 미처 타버리지 못한 아버지의 뼈가 우리 눈앞에 보였다. 어머니의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다음 과정은 아무리 제정신 아닌 유가족이라도 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하루에 양재 추모공원에서 진행되는 화장 건 수가 엄청날 것으로 짐작했지만, 최소한 유가족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무표정하며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행동에 내 감정은 경악까지 이르렀다. 저 사람들, 여기서 일하면 공무원 아닌가? 아닌가?? 그럼 일은 많고 월급 적다는 최소 시급? 계약직?? 아님 알바???
20대쯤 돼 보이는 젊은 여직원은 아버지의 뼈와 잔해를 큰 기계 안에 넣고 한 방에 갈아버린다. 어릴 적 방앗간에서 고춧가루 갈던 기계와 비슷하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드르륵.
큰 굉음과 함께 1분도 안되어 회색 고운 가루로 변해 버린 우리 아버지.
이어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나오신다. 대기하고 있던 남자 두 명(상조 회사 직원인 듯 보였다)이 봉투 같은 것에 들은 가루(아버지)를 봉안함에 넣고, 기계를 사용해 아주 꼼꼼히 진공 포장한다. 그 과정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짧은 찰나, 우리 어머니와 큰 외삼촌이 나눈 대화.
엄마 : 그래도 엄마 때보다는 낫네. 화장 내내 대기하면서 시신 타는 냄새까지 다 맡고 그랬잖아.
외삼촌 : 그러게. 그런 과정을 하나도 안 보여주네. 그때는 뼈를 사람이 직접 빻아주고 그랬는데..
봉안함을 작은 상자에 넣고, 화장터를 떠날 시간이 되자 내가 다시 영정 사진을 들고 앞장서고, 그 상자를 오빠가 들었는지, 큰 외삼촌이 들었는지까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내 뒤를 봉안함을 든 누군가가 따랐고, 그 뒤로 몇 안 되는 행렬이 따라왔다. 우리 가족과 달리 화장터의 '마지막 대기실'에는 화장 후 유골을 기다리는 유족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 지나갈 틈이 없을 정도로. 그들을 향해 장례지도사가 큰 소리로 외친다.
"장례지도사 : 영정 사진과 고인 나가십니다. 길을 내주십시오."
여자가 영정 사진을 든 게 흔한 광경이 아니었는지, 아니면 우리가 측은해 보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곧바로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반으로 쫙 갈라졌고, 우리는 그 길 사이로 지나갔는데, 간혹 사람들 중에는 나를 향해 가벼운 묵념을 하는 이들도 꽤 보였다.
쓰다 보니 주절주절 길어져서 한번 더 끊어가야 할듯하다. 우리는 썰렁할 정도로 빈 버스에 탑승했고, 우리 가족과 장례지도사, 버스 운전사 다섯 명이 달랑 탄 빈 버스는 아버지를 모실 사찰, 부천 약사사로 향했다.
마지막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