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 : 요즘 들어서 심신이 힘들다. 특히, 자기가 '갑'이라고 생각하는지, 할 말 못 할 말 다 퍼붓는 어린놈은 자신의 실수나 듣기 싫은 말은 한마디도 용납 못한다. 참다못해서 한마디 던졌더니, 열 마디로 앙갚음한다. 이 일, 계속할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스럽다. 이런 부류와 '먹고살기 위해' 상대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서럽고 더럽다.
너 자신만을 믿고 강한 마음으로 살아라 말씀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한없이 사랑만 베풀어 주셨던 아버지가 생각나 어제 그제 많이 울었더랬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인지 어머니의 한쪽 귀에 이상이 생겼나 보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신다. 빈소에는 작은 침대와 옷장, 그리고 화장실이 딸린 상주 휴식 공간이 있었지만, 어머니와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빈소를 지킨 맏상주 오빠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오전 7시 전부터 청소를 하거나, 장례식 직원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통에 반 강제적으로 선잠에서 깬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질환부터 살피기로 했다. 빈소를 오빠가 지키는 동안, 어머니와 나는 아침 8시 전에 택시를 타고 잠시 집에 들러 동네 이비인후과에서 진찰을 받았다.
집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서 집을 본 강아지 '보리'가 영문도 모른 채 우리를 반겼지만, 얼굴은 눈물범벅이다.
"언니랑 엄마랑 내일 저녁에 꼭 올게. 미안해 보리야..." 이때까지만 해도 동네에 강아지를 맡길 만한 병원이나, 지인도 없어서 개를 집에 혼자 둘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번외로 다루도록 하겠다.
아무튼, 보리가 좋아하는 간식을 잔뜩 남겨두고, 낑낑거리는 녀석을 뒤로하고, 다시 빈소로 향했다.
장례 2일 차에는 입관식을 진행한다. 상조팀장이 오전부터 식당 구석에 앉아 끈 같이 생긴 무언가를 수십 개인지, 꽤 많은 끈을 열심히 접어가면서 만들고 있다. 뭐 하시냐고 묻자, 간단히 입관식 준비 중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와서 묻는다.
"염습을 1시~2시 사이에 진행할 예정인데, 유족분들 참석하실래요?"
우리는 머뭇거리다가 안 보는 것으로 결정하고, 3시 입관식만 참석하기로 정했다. 지금 생각하니까 마지막 모습이셨는데 볼 걸 후회가 된다.
염습(殮襲)
장례식이나 입관(入棺) 전 죽은 자의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 장례 절차.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 것을 습, 그 후 시신을 염포로 싸는 것을 소렴, 입관 시 관의 빈 곳에 고인이 생전에 입던 옷을 채워 넣는 것을 대렴이라고 한다. 나라마다 장례의식이 차이가 나도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 건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관습.
과거에는 유족이 직접 했지만 오늘날에는 장례업체(장의사)가 담당한다. - 위키 백과 발췌 -
오후 3시가 조금 안되어 어제 오신 스님 3분이 도착했고, 빈소에서 잠깐의 기도를 올려드렸다. 이후, 상조 팀장이 우리 가족과 스님들을 입관실로 안내했다.
입관실 중앙 침대에는 수의를 곱게 입고 누워계신 아버지가 있었다. 상조 팀장이 말한다.
"아버님께서 어릴 적, 상주님들에게 첫 신발을 신겨주셨던 기쁨을 생각하면서, 자녀분 각각 아버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신을 신겨 주십시오. "
오빠와 나는 각각 한 켤레씩의 적삼으로 만든 버선처럼 생긴 양말을 신겨드렸다. 이때부터 우리 가족은 엄청나게 울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장례식 후,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통화한 지인도 본인 아버님 장례식 때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어떻게 멘트가 다 똑같구나' 하며 서로 속도 없이 웃었다.
"이제는 정말로 아버님의 얼굴을 뵐 수 있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앞으로는 기억 속에서, 그리고 고인의 모습이 남은 사진에서 아버님의 모습을 떠올리실 겁니다.
아버님을 염습하는 과정에서 저희가 느낀 점이라면, 다른 분들은 표정이 일그러졌거나, 이를 악물고 계시는 분도 있었는데, 우리 아버님은 얼굴이 평안하셔서 마치 주무시고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으로 아버님의 얼굴을 쓰다듬으시며 인사를 나누십시오. 다만, 안치실에 계셔서 몸이 차가울 수 있으니 놀라지 마시고요."
제일 먼저 맏상주인 오빠가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어머니와 나 그리고 스님들까지 놀랄 정도로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의 첫아들이었던 오빠 이름은 잊지 않고 찾으셨는데, 그 모습을 못 보고 보내드린 것이 이제야 실감 나나보다.
참고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내 이름과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고, 어머니도 그저 잘 아는 '아주머니'로 불렀지만, 희한하게 오빠 이름은 또렷이 발음하며 어머니에게 '우리 아들 **는 언제 오냐"라며 몇 번이나 물었다고 한다.
처음에도 언급했지만,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당시 코로나 19로 중환자실 면회는 전적으로 금지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소생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 담당 의사의 배려로 어머니와 나는 2번 정도 몇 분간의 면회를 허락해 주었다.
아버지는 생전, 술을 좋아하셨고, 술을 많이 마셔도 항상 아침 7시 이전에 보통 5시쯤 기상하셨다. 나중에 가족끼리 추측이지만, 돌아가시기 전, 새벽 5시부터 깨셔서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고 계셨을 것이고, 우리를 애타게 찾으셨으리라. 화가 나는 건, 병원에서는 그때 유족을 부르지 않았나.
이제 와서 후회하고, 화를 내봤자 소용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수의를 입고 누워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는데, 내 차례가 왔다. 정말 주무시는 모습이었고, '아빠!'하고 부르면 평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시고, 다정하게 "왜, 왜"라고 대답하실 것 같았다. 그러나, 평온했다.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사실, 아버지는 7년 전쯤 큰 고비가 한 번 있었다. 저혈당으로 의식 불명이었는데, 119 구급대가 와서 포도당 주사를 놓으니, 바로 눈을 번쩍 뜨셨다. 바로 응급실로 가서 검사와 치료를 받고, 퇴원하고 나오실 때, 얼마나 즐거워하셨는지...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당패 한 무리가 흥겹게 연주하고. 춤을 추면서 나를 반기는 거야. 같이 춤추면서 놀고 있었는데... 깼어." 그렇게 당신 스스로 걸어서 응급실을 나왔던 아버지. 그러나 기적은 두 번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 그때처럼 사당패 무리와 어울리고 계시는 걸까...?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