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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다씨

수천 번 루다라고 불려도, 나는 루고니까

by 이루고

나는 완성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어떻게든 완성이 되는 형태여야 하겠지만.
완성처럼 보이는 미완성이어야 하겠지만.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이어지지 않은 것들은 끊어지지도 않으니까.
완성보다 미완성이 더 오래 지속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종결되지 않은 것들이 내 주변을 행성처럼 돌고 있는 편이 더 행복하다고.

「 나주에 대하여 / 김화진 」



낡은 초록색 시트지가 붙어있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어서 와요, 루다씨."




루푸스 전신 관절염은 많은 것을 못하게 만들었다. 염증으로 굳어버리거나 변해버린 관절은 일상생활은 물론, 운동을 하는데도 부지런히 방해를 놓았다. 그래도 운동은 해야 하기에, 할 수 있는 운동을 한참 고민하다 우연히 본 요가학원 간판이 떠올랐다. 어떤 학원일지 궁금한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키보드를 두드렸지만 주소만 덩그러니 있을 뿐. 어떤 곳인지 짐작할 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층 더 조심스러워진 마음이었지만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중년의 여성분으로 짐작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가학원을 등록하고 싶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일 오시겠어요?"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렇게 두 달 전부터 요가를 다니기 시작했다.


신장 합병증으로 늘 통통해져 있는 다리는 민트색 레깅스를 격렬히 밀쳐냈다. 강한 저항에 패배를 인정한 나는 헐렁한 면타이즈를 입고 요가를 한다. 집에 있는 듯한 평온한 모습이지만 한 시간 내내 숨 막히게 하는 공격을 버텨내기란 쉽지 않으니까.


무릎을 완전히 굽히고 펴는 동작이 버거운 탓에 매트에 앉기까지도 시간이 걸린다. 자세를 미처 바꾸기도 전에 동작이 끝나버리는 일은 이제 익숙하다. 처음 한 달은 애써 따라가 보려 했지만 이젠 할 수 있는 동작을 느리지만 하나씩 흉내 내보고 있다.


요가가 아닌 스트레칭이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리지만.




나는 무언가 새로 해보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혼자서도 참 잘했다.

처음부터 잘한 건 아니었지만, 학창 시절부터 소수의 친구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나는 지금도 몇 명의 친구와만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마저도 지역이 달라 낯설어진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먹는 일이 익숙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는 혼자인 시간이 대부분인데,

혼자서라서 못하면 난 아무것도 못하겠네.

그럼 혼자서 해야겠다.'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혼자 등록하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혼자 찾아가고

예쁜 카페가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배우는 활동은 대부분 손을 써야 했기에 손가락 관절 변형이 생기고부턴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활동인지 이리저리 찾아보며 내가 할 수 있는지 한참을 고민했다.


어느 날은 제빵을 배워보고 싶은 마음에 학원문을 두드렸다.


방문 상담이 끝날 무렵,

인적사항을 적는 종이 맨 아래 '특이사항'이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잠시 고민하다 '손가락 관절 변형이 있어 움직임이 제한됨'이라고 적었다. 글을 적는 내내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던 상담 선생님은 "이 부분은 원장님께 말씀드려봐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셨다.


며칠 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번호가 화면에 떴다.


"다른 수강생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어 수강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는 말이.


아니 "이제 이 세상에서 나가주시겠어요?" 라는 말이 들렸다.


조용하고도 갑작스런 거부에 어떤 반항도 해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한참을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가만히 있었다.


그 후로 '무언가를 배우는 데 주춤하기 시작했다' 가 아니라 '무언가를 배우는데 더 이상 동의를 구하지 않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이론적으로.

내 손으로 무언가를 해낸다는 건 가능보단 불가능에 가깝다.


"저도 배워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나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고.

아무것도 손으로 할 수가 없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휘어진 손으로 해보신 적 없잖아요.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내가 해낼지 못해낼지."


당근을 작게 썰지 못하고

생수병 뚜껑을 따지 못하고

세 줄 이상의 문장을 볼펜으로 쓰지 못하지만


당근을 뭉툭뭉툭 썰어 믹서기에 넣으면 되고

편의점 직원분께 조심스레 부탁하면 되고

노트북으로 천천히 글을 쓰면 된다.




요가선생님은 나를 루다씨라고 부른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아닌 낯선 이름을 꺼내시고선, 오늘도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고 말하신다.

복수로 가득 찬 내 배를 보시며 가스 빼는 동작을 알려주신다.


선생님은 나에 대해 많은 말을 하시지만,

나에 대해 아시는 것은 없다.


나는 굳이 정정하고 싶지 않았다.

루다면 어떻고

옆아파트에 살면 어떻고

가스 찬 배면 어떤가.


누가 나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는 필요치 않다.


결국, 나를 만드는 건

타인의 말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시선과 태도니까.



나는 내가 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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