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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행복

길들이기 대작전

by 이루고

"영화의 꿈을 꾸던 시절, 나는 온갖 감독과 배우의 인터뷰를 찾아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에는 보통 그것이 있었다. <굴곡>."

- 배우 / 작가 박정민 -



잠이 쉽게 들지 않는 밤이면, 영상을 머리맡에 두고 눈을 감는다. 자장가 대신, 누군가의 진심 어린 이야기를 들으며 스르륵 잠들곤 한다.


긴 어둠이 이어지던 어젯밤.

차가운 밤을 데워 줄 이야기를 찾다 세바시 영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개그맨 김기리의 강연이었다. 그의 여러 이야기 중 유독 마음을 붙잡은 건 가족이야기였다. 두세 살 수준의 지능을 가진 발달 장애인 처남을 소개하고선 곧이어 장모님의 말을 전했다.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평생을 어린아이 같은 아들과 함께 살며,

평생 어린아이의 귀여움을 볼 수 있어

참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눈을 감고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한참 동안 되뇌었다.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다.'라는

너무도 익숙하고 뻔한 말.

어쩌면 그래서 와닿지 못했을 말.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말이 가슴 깊숙이 한 발자국 성큼 다가왔다.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왜인지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부여받기 위해 행복할만한 이유를 애써 나열해 가며 이 정도 조건이면 <합격>이라는 도장을 찍어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분의 문장에는 억지로 붙인 조건도

애쓴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대학 동기에게 잘 지내냐는 메시지가 왔다. 잘 지낸다는 말과 함께 너도 잘 지내는지 되물었다. 그녀는 임신을 했다고 말했다. 신기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 중에서 임신 소식을 들은 건 처음이었기에.


"임신했어."라는 네 글자에는 선명한 행복이 묻어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여기저기 마음을 흩뿌리고 있는 친구가 보였다. 아들이라는 말에, "아들은 엄마 닮는다는 데 큰일 난 거 아니야?"라는 말로 설레는 마음을 장난스러운 포장지로 감싸 보냈다.


그런데 기쁜 마음 한 구석 끝.

묵직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어쩌면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품었을지도 모를 나이.


같은 나이.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기분.


친구의 잘 지내냐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잘 지내고 있는 걸까.

잘 지낸다는 건 뭘까.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던 그때.

기억 속에 흩뿌려놓았던 어젯밤의 문장 조각들을 다시 주어 모았다.


"장모님은 감사 레전드이십니다. 몇십 년을 기도와 노력으로 쌓아오신 감사의 실력이 없었다면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었을까 싶고, 정말 제대로 삶을 음미하시는 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행복이란 건, 길들여지지 않은 반려견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열고 진짜 짝이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행복도

진정한 내 것이 되려면, 오랜 인내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단 걸.

그저 찾아와 머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다가가야만 간직할 수 있단 걸.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말없이 곁을 지켜주다가도

때론 으르렁거리며 당황스럽게 하기도 한다.


여전히 서툰 나지만

오늘도, 다시 눈을 맞추는 연습을 해본다.


어쩌면, 행복도.

나만큼이나 나와 함께하고 싶어서

내 곁을 지켜온 것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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