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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느리다니까

너무 소중해서.

by 이루고


무심코 휴대폰을 열어 네이버앱을 켰다.

< 재미로 보는 사주 - 태어난 시간별 타고난 성격 >

화면을 넘기려다 괜스레 호기심이 일어 화면을 눌렀다.


태어난 시간은 밤 아홉 시 사십 분.

슥슥 아래로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흐릿한 글자들 사이에서 한 문장만이 선명해졌다.


-행동은 느리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영리하고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이건 맞네.'


특히 '행동은 느리지만'이라는 부분이.

뒷 문장은 아마도 맞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는 느리다. 행동도, 말도, 생각도 늘 한 박자씩 느리다. 카페에서 음료 하나 고르는 데에도 오래 걸린다. 그래서일까, 그는 카페 가는 길에 늘 묻는다.


용이: 정했어?

나: 아니, 아직.

용이: 도착하기 전까지 미리 정해놔.


(카페도착)

용이: 정했어?

나: 아니, 아직.

용이: 또 아직이야?

나: 다 정해가. 둘 중에만 고르면 돼. 카페라테 먹을지, 망고스무디 먹을지 고민 중.

용이: 진짜 느리다니까.




본디 느린 성향을 지녔지만 관절염이 생기고부턴 몸도 점점 느려졌다. 마음은 얼룩말을 향해 내달리는 치타인데, 몸은 나무에 매달린 나무늘보 같았다.


지금은 다행히도 무릎에 물이 차는 날이 드물지만 20대엔 그렇지 못했다. 한 번 물이 차면 일주일은 기본이었다. 일 년 중 무릎이 멀쩡한 날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통증도 심했지만 무엇보다 구부려지지 않는 무릎은 일상의 가장 큰 방해꾼이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한 시간 반거리의 직장을 오가던 그때.

굽혀지지 않는 무릎을 질질 끌고 다니곤 했다. 계단을 오를 땐 무릎보호대를 세게 조이고선 이를 악물며 한 발씩 올랐다. 몇 걸음 가지 못한 채 멈춰 서기를 반복하며.


무릎이 유난히도 부어올랐던 어느 퇴근길.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 앞에 섰다. 어서 빠르게 지나가라는 소리가 울렸다. 이십 초라는 시간은 참 짧았다. 차들은 말없이 눈치를 보내는 듯했다.

모두가 흩어져 사라져 갈 때 도착한 길 건너편. 전봇대를 붙잡고 무릎을 어루만지는데, 등 뒤에서 낯설지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세요?"


대답을 뭐라고 했는지. 대답을 하긴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남자분이었다는 것만 흐릿하게 남아 있다. 괜찮냐는 한 마디에, 마음속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나름대로 잘 걸어 다니며.

잘 견뎌내며.

잘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 나는 위태로워 보였던 걸까.

나 사실 아팠던 걸까.

나 사실 버거웠던 걸까.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전봇대를 붙잡고 말없이 오래도록 울었다.


해져버린 무릎 보호대는 여전히 서랍 한편에 그리고 마음 한쪽에 조용히 남아 있다.




한참을 메뉴판 앞에서 서성거리는 이유는 한 잔도 허투루 고르고 싶지 않아서다.

그날의 기분, 그날의 온도, 그날의 분위기.

그 모든 것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잔을 고르고 싶다.


복수가 차는 탓에 수분을 조절하며 지낸다. 물 한 잔도 긴 고민을 끝낸 뒤에야 마실 수 있다.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해도 절반도 마시지 못한 채 남긴 곤 한다. 어쩌면 언젠가는 한 모금의 음료도 먼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다행히도 느리지만 큰 통증 없이 걸어 다닐 수 있다. 하지만 또 언젠가 무릎에 물이 차, 걷는 일이 낯선 일이 될지도 모른다.


매일 올 줄 알았던, 평범한 날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사소한 순간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앞에 놓인 이 순간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서.


오늘도 메뉴판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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