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름에 함께였던
드디어 왔다. 오다가도 다시 도망가 버리 던 여름이. 이번엔 자신이 온 것을 확실하게 알리고 싶다는 듯 최고기온 29도로 당차게 등장했다. 뜨거웠던 하루의 고단함을 미지근한 물로 씻어내고 선, 옷장 앞에 섰다. 검정, 파랑, 초록을 지나 아이보리색 반팔 티셔츠를 꺼내 들었다. 가장 아끼고, 가장 좋아하는 옷이다.
무표백 오가닉 천을 사서 직접 만든 티셔츠.
오래전, 철창 속에 갇혀 살고 있던 사육곰을 위해 만들었던 후원 티셔츠다. 크라우드 펀딩 결과는 씁쓸한 기억이 되었지만, 이 샘플 티셔츠 하나가 남았다. 고흐 작품을 재해석한 그림이 뒷면에 프린팅 되어있다. 밖에서는 꺼내 입은 적이 없다. 예쁘면서도, 무엇보다 편안해서 집에서만 입는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다 그녀의 소개팅 에피소드를 들었다. 여러모로 괜찮은 사람이라 말했지만 더는 만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양식집에 갔는데, 먹고 싶었던 고르곤졸라 피자를 먹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치즈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유당불내증으로 우유를 먹지 못하는 그는 금기의 사랑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마음이 불편했다. 마치 내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나 역시, 우유를 먹지 못한다. 그뿐이랴. 먹지 못하는 음식은 수없이 많다.
'이렇게나 못 먹는 음식이 많았는데, 용이랑은 왜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을까.'
용이는 한 번도 같이 먹지 못해서 힘들다는 티를 낸 적이 없었다.
무표백 오가닉 티셔츠는 화려하지 않지만, 심심하지도 않다.
등에 그려진 담백한 그림 하나.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적당한 도톰함의 부드러움.
땀흡수가 잘 되는 면소재.
은은한 아이보리빛 위에 드문드문 박힌 목화솜 씨앗.
이 티셔츠를 가졌다고 해서 어떤 의미 부여를 해본 적은 없다. 유난히 만족스럽다던가, 운명의 옷이라던가 하는 말들을. 특별한 날에는 진한 녹색 반팔 니트나 하늘색 크롭 티셔츠를 꺼낸다. 여름 중 이들을 입는 날은 고작해야 두세 번이다. 도톰한 반팔 니트는 무겁고 세탁도 번거롭다. 크롭 티셔츠는 배가 보이진 않을까 하루종일 신경이 쓰인다. 앞으로도 새로운 티셔츠를 찾아 물감 속을 헤맬 거다. 그렇지만 어떤 티셔츠를 사더라도 꺼내 입는 날은 세 번을 넘기진 못할 거다.
오가닉 티셔츠는 여름의 절반 이상을 늘 함께했다. 모든 여름에 그래왔고, 앞으로의 여름에도 그럴 거다. 너무 자주 꺼낸 만큼 어느새 처음보다 많이 늙어버렸다. 언젠가는 구멍이 나고, 입을 수 없을 만큼 낡아버리는 날이 올 거다.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당연해져 버렸다. 이 티셔츠를 꺼내 입는다는 게.
세상에 하나뿐인 티셔츠.
가장 편안한 티셔츠.
가장 좋아하는 티셔츠.
결국 아무리 화려하고 비싼 티셔츠를 사도, 돌고 돌아 손이 닿는 곳은 이 티셔츠다.
용이와 나는 운명적인 스토리도, 닮은 구석도 없다.
그와 함께한 나날들을 찬찬히 돌이켜보면 그저 무난하고 평범했던 시간들.
하지만, 그 무던한 하루하루가 편안했고 따듯했다.
먹고 싶은 메뉴는 그의 마음 바닥 어딘가에 묻어둔 채,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만 먹던 시간들.
운명이란, 함께하는 시간이 편하다는 감각이 아닐까.
화려하지도 눈부시지도 않지만, 나도 모르게 잡아 버리는 옷처럼.
그저 그렇게 곁에 있는 것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지고 결국은 없어선 안되는.
그저 여름에 입으면 편했기에
자주 꺼내 입는게 익숙해져버렸고
그 자리에 걸려 있는게 당연해져버려
그저 평범하다고 생각했던건 아닐까.
사실은, 내 몸에 꼭 맞는 하나밖에 없는 운명의 티셔츠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