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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그덕거리던 시절을 지나, 결국 만나게 되는

by 이루고


"후아. 드디어 도착했네."

지하철로는 세 정거장 거리. 걷고 또 걸어 도착한 서울도서관.




60만 원이 든 통장 하나와 빨간 백팩 하나 메고 올라온 서울.

고시원에서 출발해, 원룸 하나를 마련하며 나만의 첫 보금자리를 갖게 됐다. 천만 원이라는 보증금을 마련하기까지는 긴 가난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실 물은 전날 밤, 커다란 냄비에 끓여놓고 잤다. 전화와 문자만 가능한 휴대폰을 사용했다. 인터넷은 물론 없었다. 텅 빈 방에는 꼭 필요한 것들만 들여놨다. 중고 세탁기, 중고 냉장고, 위메프에서 구매한 5만 원짜리 매트리스, 4만 원짜리 하이라이트가 살림의 전부였다. 일을 하지 않는 주말이면 할 일이 없었다. 인터넷도 데이터도 없었기에 휴대폰도 노트북도 꺼낼 일이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방안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돈 들이지 않고 시간을 보낼 방법은 뭐가 있을까..."

다리가 없는 매트리스에 앉아 오랫동안 턱을 괴고 있다 문득 책이 떠올랐다. 책이라곤 학창 시절 독후감을 쓰기 위해 읽어본 게 전부였다. 책과는 어색한 사이였지만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엔 이보다 더 괜찮은 건 없어 보였다.


삐그덕 소리가 나는 현관문을 열고 서울도서관으로 향했다. 지하철요금도 아껴야 했기에 걸어서 가기로 했다. 에세이 책 세 권을 빨간 가방에 넣고 지나온 풍경을 다시 눈에 담았다. 어깨는 점점 무거워졌다. 분홍색 티셔츠가 땀에 젖어 진한 색으로 물들어갈 때쯤, 방에 도착했다. 하얀 이불 위에 세 권을 꺼내어 이러 지리 뒤집었다.


'저녁은 뭘 먹지?'

글을 읽어 내려가다 자꾸만 다른 생각을 했다. 20분도 지나지 않아 냉장고를 기웃거렸다. 어느샌가 대출기간이 다가왔다. 절반도 채 읽지 않은 책. 나머지 두 권은 펼쳐보지도 않았다.


"운동하려고 빌려왔구만..."

세 개의 운동기구를 백팩에 차곡차곡 담았다. 삐그덕 거리는 문소리가 났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한 달 동안은 건강 서적 코너에만 머물렀다. 그다음은 건강한 음식을 해 먹기 위해 요리 코너로 이동했다. 퇴원 후의 삶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빠진 병도 일상에 녹아들기 시작했을 땐, 자유롭게 책장 사이를 오갔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미래를 준비하는 방법도 알고 싶어졌다.


아마도 나에겐 책이란.

"지금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의 해답을 찾는 열쇠였다.


'나는 지금 너무도 절망적이에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지금 몸이 망가졌어요. 먹던 음식을 먹을 수 없어요. 오늘부터 무얼 먹어야 하죠?'

'나는 지금 걸을 때마다 고통스러워요. 이 고통을 당장 어떻게 없앨 수 있죠?'

'나는 지금 돈이 없어요. 앞으로가 너무도 불안해요. 어떻게 살아야 하죠?'


지금 당장. 생존이 절실했기에 필요한 정보 서적만을 붙잡아왔다.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되고 한 편 한 편 글을 연재했다. 한 달쯤 지나자, 노트북 앞에 멈춰있는 시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글을 많이 읽어라." 그 뻔한 말을 의심할 필욘 없었다. 글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이치다. 된장찌개를 잘 끓이려면 된장찌개를 많이 먹어봐야 한다. 커피를 잘 내리려면 커피를 많이 마셔봐야 한다. 특히나 창작은 정보 그 너머의 감각을 깨우는 일이다. 많이 보고, 듣고, 읽고, 맛보고, 만져야 한다. 흔들어 깨어난 감각 위에서만 나만의 세계가 춤을 춘다.


800번대 코너로 갔다. 소설의 세계가 있는.

문장력과 표현력을 일깨우는 데는 소설만 한 게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정답을 내리듯 문장을 마무리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닫힌 결말보다는 열린 결말이 좋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내가 결론지어야 내 것이 되는 거니까.


책을 빌릴 땐 적어도 세 권 이상을 가져온다. 재미없는 책을 만나면 주저 없이 책장을 덮는다. 유명한 책이라고 해서 읽어야 한다는 강박은 갖지 않는다. 하루에도 새로운 책은 쏟아진다. 읽기 싫은 책에 잡혀 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수많은 책을 읽다가 덮기도 하고, 읽지 않기도 하고, 두 번 읽기도 한다.




책도, 사람도. 아무리 좋아도 내게 맞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책도 사람도. 저마다 만나야 할 시기가 있다.

어떤 인연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지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만났기 때문에 비로소 인연이 된 게 아닐까.


그때의 우리였기에.

그때의 나였기에. 그때의 너였기에.

우리가 지금, 인연이 되었다.


책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그저 재미없는 책일지라도

언젠가는 인생 책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

아직은 만날 시기가 아닐 뿐.

그러니 다음에 만나자고 말할 수 있는 작은 용기 하나면 된다.

지금, 나를 기다리고 있을 책을 만나러 걸음을 옮기면 된다.


철커덕 거리는 현관문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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