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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지 않은 참외

아니고, 특별한 참외

by 이루고


"낚시 갈까?"

"그래, 가자"

무심코 내뱉은 듯한 용이의 말에 나도 무심코 대답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예상에 없던 바닷가로 향했다.




낚시를 좋아하는 용이를 따라나섰다. 낚시는 오로지 용이의 일. 나는 낚시를 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은.


옆자리에 앉아 어제의 일부터 십 년 전 추억 상자까지 꺼내보는 일.

아담한 2인용 텐트를 펼치고 캠핑용 의자에 앉아 파도를 바라보며 간식을 먹는 일.

용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혹여나 물고기가 잡혀 방울이 울릴까 그 작은 방울을 바라보는 일.

모래사장을 걸으며 파도에 쓸려 내려온 조개껍질과 불가사리를 주워보는 일.

바닷바람을 맞으며 오들오들 떠는 일이다.




요리를 하지 않는 용이가 유일하게 부엌을 점령하는 날이 있다.

바로 낚시 가는 날.


점심 메뉴는 언제나 유부초밥과 컵라면.

유부초밥 셰프는 용이다. 셰프는 얼마 전 사온 참외도 곱게 썰어 반찬통에 담았다.

하나 달라진 건, 컵라면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점. 저염식을 해야 하는 나는 늘 데려오던 진짬뽕을 두고 왔다. 차가운 바닷바람과 허기를 데워 줄, 작은 따스함도 같이.


놀러만 가면 아침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 데 괜히 배가 고프다. 먹고 있는 데도 입이 심심하다. 낚싯대가 펼쳐지는 동안 텐트 안에서 하늘색 가방을 뒤적거렸다. 참외가 담긴 유리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가지런히 담겨 있는 씨 없는 하얀 참외 조각들. 씨를 소화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용이가 모조리 씨를 빼놓았다. 가장 작은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단단한 겉살은 달큼하다. 미처 발라내지 못한 씨들이 톡 터질 때마다 달달함이 입안에서 번졌다. 순식간에 세 조각이 사라졌다. 흥얼거리며 다시 젓가락을 올렸다.


"음, 이건 별로 안 다네."

중얼거리고는 남은 조각을 입에 넣었다. 가장 최상급이라는 참외를 데려왔는데 안 단 조각이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이내 걱정이 밀려왔다.


'다른 조각들도 같은 몸에서 떨어져 나왔으니 몇 조각은 안 달겠지, 후우.'

달지 않은 참외를 먹으려니 소풍 가는 날 숙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눈을 감고 초록색 캠핑의자에 기대어 오물거렸다. 아삭한 식감만이 입안에 가득 맴돌았다. 참외가 스쳐지나 왔을 시간이 이내 머릿속에 번지기 시작했다.


씨앗이던 시절이 있었겠지.

자신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조심스레 물도 마셔보고, 슬며시 비료에도 몸을 비벼보았겠지.

어두운 땅 속에서 하염없이 긴 시간을 기다렸겠지.

뜨거운 햇살이 비로소 땅을 두드리면 노란 셔츠를 입고, 하얀 스카프를 두른 채 '에헴.'하고 세상에 걸어 나왔겠지.


눈을 뜨자, 미안함이 몰려왔다.

달기 싫어서 안 단 게 아닐 텐데.

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다했을 텐데.

이게 너의 최선이었을 텐데.


함부로 실망해서 미안했다.




각자의 길이 있다지만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성공의 틀이 분명히 존재한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타이틀을 다는 것.

통장에 숫자가 많아지는 것.

집이 넓어지는 것.


사회 속에서도 나라는 존재는 늘 평가받는다.

사회의 기준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 어떤 곳에서는 환영받고, 어떤 곳에서 외면당한다.


최고급 참외박스에도 달지 않은 참외가 있을 수 있다. 같은 밭에서 같은 물과 같은 비료를 먹었어도 말이다. 똑같이 노력했는데, 나만 잘 안될 수도 있다.


이유?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변수가 존재하니까.


달지 않은 참외는.

오이처럼 수분을 채워주면서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당뇨 환자에게 환영받는 과일이 될지도 모른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

존재의 가치는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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