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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텔 Aug 15. 2023

운칠기삼으로 공구리친 순살황궁

<콘크리트 유토피아> - 재난 투기꾼의 아파트 신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아파트 개발 역사를 요약한 인트로 시퀀스에서부터 희망찬(!) 부동산 신화를 적극적으로 표면화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기존의 계급질서를 해체하는 카타르시스 대신 역으로 절대화하는 불편함을 택한다.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창작물이 ‘기존의 세계질서가 리셋된 상황에서 원시적인 힘의 체계가 지배하는 과정’을 그리며 인간의 본능적 잔인함을 폭로한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역학관계는 여전히 아파트의 물성에 기반한다. 삶의 주도권이 여전히 재난 이전 가치의 손에 쥐어져 있는 세상, 스크린 밖 현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세상. 소파 밑으로 굴러 들어간 황도 캔을 꺼내려다 아래 숨어있던 바퀴벌레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던 것처럼, 지진으로 서울 지하층을 한번 탁 털면 기어 나오는 인간 군상을 구경하는 맛이 일품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물의 탈을 쓴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가장 비논리적이고 설득력 떨어지는 선택지가 어쩌면 가장 개연성 있는 답이 된다. 극단의 세계관에서 ‘불행한 자들 중 가장 행복한 자’가 된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정확히 이 비논리의 서사 - 운에서 신앙으로 - 를 순항한다. 주민들은 일견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주어진 행운에 대응해 나간다. 통제 시스템을 제안하는 민성이나, 아파트 주민수칙을 내세워 주민자치를 실현하는 영탁과 금애 모두 질서와 합리를 기반으로 어수선한 단지를 결속하고자 한다. 드림팰리스 주민들이 황궁아파트 주민을 차별한 적 있으니, 지금 우리도 마땅히 그럴 수 있다는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주장에 모두 설득된다.


핵심은 이들이 서 있는 기반 자체가 전혀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데 있다. 스스로도 운이 좋았다고 말할 정도로 오로지 확률적 우연에 의해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그들의 생존에 논리적 타당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아파트 덕분에 살았다는 안도감이 사라지고, 이 아파트에 사는 우리기에 살았다는 인식이 보편화된다. 집이 자가인지 아닌지, 대출은 얼마나 꼈는지, 집문서는 가지고 있는지가 여전히 생존권의 기준이 되는 유토피아를 보며 비합리적 상황에서 일종의 인공물인 논리를 고수하는 것이 반드시 타당한 선택인지 질문하게 된다. 동시에 그들을 지배하는 논리, 즉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논리가 실은 얼마나 얄팍하고 비논리적인 것인지 실감한다.


스스로도 분명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논리적 비약을 메꾸기 위해서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영탁이 앞장서 외부 주민들을 몰아내는 승리를 이끌어낸 전투에서 행운은 신앙으로 진화한다. 인간은 단발성 기적에 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재현 가능한 기적에 신앙을 믿게 된다. 운빨로 살아남았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게 해 준 물리적 승리, 벽으로 고립되고 벽으로 규정된 콘크리트 공동체, 일말의 인간적 죄책감을 전가할 수 있는 리더-순교자의 등장. 허점 많은 구시대적 논리가 더 굳건한 컬트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 선택받은 아파트에 사는 선택받은 사람들, "살인범이나 목사님이나 똑같아 이제".



먼지 쌓이고 금 간 외벽의 복도식 아파트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수많은 숏들, 단지 정비 사업을 마치 선전영화처럼 극화하는 신은 스탈린 치하의 구 소련, 또는 유신 정권 시대의 새마을 운동을 연상할 수밖에 없도록 의도적으로 연출되어 있다. 기존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인 이기주의를 대체하기 위해 ‘멸망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역으로 재출현하는 구성은 과연 두 가지 질서 사이에서 우열을 가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우리는 그런 어두운 시기를 통과해 수많은 아파트를 세웠고, 그 시절 아파트는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의 상징이었고, 그 아파트 속에서 우리는 휴먼거지니 임대충이니 하는 말을 일삼고…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을 지탱해 주는 수많은 행운의 기둥들을 스스로의 성과인 양 전시하고, 전체주의 신앙이 제공하는 집단적 침묵의 편안함은 개인에게 지워지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이성이 감성의 반대여서 차가운 것이 아니라, 이성의 탈을 쓴 비이성이기에 서늘하다.


콘크리트가 굳건한 이상 힘의 체계는 변하지 않는다. 아파트가 상징하는 절대적인 힘 속에서 그 권력을 부여받은 등장인물들은 몇 가지 정해진 플롯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주민들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아파트에 대한 신앙이고, 영탁은 그의 대리인일 뿐이다. 영탁이 진짜 주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짐과 동시에 주민들이 그에 대한 신뢰를 한 순간에 거둔 이유는 그의 신성성에 결함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주민수칙은 규율이자 성서이고, 아무리 공헌도가 높은 사람이더라도 신에게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면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돌아온 혜원에게 사람들이 아니꼬운 시선을 던질지언정 단지 밖으로 내쫓지 못하듯이.


그릇된 신앙에 균열이 생기고 배신자와 결탁한 외부인의 침입으로 끝내 황궁 공동체가 멸망할 때,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신앙의 회복에서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단지에서 겨우 도망쳐 온 민성과 명화는 쓰러진 교회에서 잠을 청하고, 부상을 입은 민성은 성화 사이로 햇살이 아름답게 비쳐 드는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에서 숨을 거둔다. 생존을 위해 점차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대표적인 인물인 민성이 죽고, 끝까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지킨 명화만이 창틀 너머의 박애주의적 공동체로 편입되는 모습은 심판과 구원의 모티프, 포용과 사랑으로 삶의 고난을 이겨내는 이상적인 기독교적 공동체의 희망을 연상케 한다.



다만 이것이 과연 긍정적인 결말인지는 확실치 않다. 추기경의 사진과 십자가가 놓인 노인의 방에서 영탁이 걸어 나오는 영화 초반의 신을 떠올릴 때, 지극히 종교적인 가정(살해당한 진짜 영탁도 정상인은 아니었다는 묘사가 나오지만)의 아이덴티티를 찬탈한 영탁이 아파트 신앙의 인도자가 되고 타락하는 이야기 끝에 명화가 교회에서 걸어 나오는 장면이 놓인 것은 묘한 기시감을 준다. 아무리 이타적인 목적이라도 개인의 신념에 사로잡혀 일정 부분 선을 넘어가기도 했던 명화임을 생각해 보면, 실은 그녀 또한 황궁의 유전자를 지니고 황궁에서 기어 나온 바퀴벌레와 다름없다 여겨지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무엇보다, 그들도 그저 ‘보통 사람들이었다’고 담담하게 인정하기에.


그 보통 사람들, 기막힌 운 7할과 군집의 기세 3할로 살아남아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단지’의 주민이 된 사람들을 비난하는 일이 참 어렵다. 옆으로 누운 고급 아파트에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을 믿어보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오늘 내가 사는 아파트가 순살이 아닌 게 다행이고, 어제 칼에 맞은 사람이 내가 아닌 게 그저 다행이기에 바빠서, 그렇게 매일매일이 분수에 넘치게 운수 좋은 날이어서. 겨울은 너무 춥고, 똑바로 서나 모로 누우나 즐거운 나의 집.




사진 출처: MBC, 씨네21,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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