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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텔 Aug 25. 2023

복숭아 가격에 화나서 쓴 글

창 밖을 보라 창 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본가의 내 방에 에어컨이 생기고 내 짜증이 조금은 줄어들었다고 한여름에도 선풍기 바람조차 마다하는 엄마가 말했다. 에어컨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기 위해 침대 머리를 창가에서 1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로 밀었다. 더운 날에는 언제나 창문을 열고 살았지만 이번 여름 창문틈이 벌어진 일도 한 번 없었다. 대자로 누워 머리 위로 1미터 정도 밀려간 천장을 보고 있자니 여기가 절대 꼬박 십오 년을 살았던 제주도 우리 집 내 방일 리 없다. 여름이기에는 지나치게 쾌적했다.


오피스타운 한복판의 자취방으로 이사하고 몇 달 뒤 맞은편 건물이 무너졌다. 그걸 무너트린 사람들이 여전히 어느 법무법인의 사옥을 짓느라 분주하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바닥에 먼지가 쌓인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엄마 그동안 고생하셨겠네. 아니 그게 아니라 제주도에서 삼사 일은 열어 놔야 쌓일 법한 양의 먼지가 한 시간 만에 책상을 뒤덮는다. 방충망에는 시꺼먼 먼지가 덕지덕지 묻어 숨 쉴 구멍이라곤 흔적도 안 보이는데 이건 모기가 아니라 삼중수소여도 못 통과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상 이중창이 아니라 삼중창이었지만 소리는 잘 들어왔다. 아침 여덟 시만 되면 드릴이며 용접기가 사중창 오중창을 하고 나는 세상에서 맥모닝을 가장 자주 먹는 백수가 됐다. 이 집에서 편히 창문을 열고 지낼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소음으로 치자면 크게 다를 바 없는 빌트인 공기청정기에 의존하기로 했다.


영국의 어느 지방도시 바람이 슝슝 들어오는 홑창 오두막에 이 년 정도 살았다. 벽 너머 십 리가 온통 들판인 주제에 사람들에겐 방충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듯했고 매일 다른 거미들 나방들과 동침하느라 외로운 타향살이가 반전없이 외로웠다. 겨울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목구멍이 쩍쩍 말라붙었고 히트텍 두 겹으로 감싸인 팔다리에 감각이 좀 둔했다. 여름 평균기온 23도라는 영국의 6월은 30도를 넘기기 일쑤였고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없는 방에서 가만히 있으면 하나도 안 덥다 최면을 걸며 나는 또 어떻게 살아냈다. 미개한 놈들 한국에 돌아가면 에어컨을 절대 끄지 않겠다 다짐했더니 본가에 내려온 지 8일째인 지금 나는 어째 자취방 에어컨을 안 끄고 내려온 것 같다.


자취방에서 계속 에어컨 바람을 쐬자니 너무 머리가 아프고 어쩐지 몸도 찌뿌둥한 것 같아서 에어컨을 끄니 더위가 몇 배는 더 견디기 힘들게 느껴졌다. 며칠간 에어컨을 틀어놓은 채로 잠들었더니 이제는 코로나라 부르면 안 될 것 같은 독한 감기에 걸려서 여전히 에어컨을 틀어놓은 채로 며칠을 앓았다. 아 그때는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없는 곳에서도 잘만 버텼는데. 창문 열면 방충망 없이 바로 풀밭이어서 벌레는 좀 있어도 그 뭐랄까 진짜 웃긴 얘기지만 알 수 없는 자연의 묵직하고 신선한 에너지가 진짜 방 안으로 들어오고 그랬는데. 에어컨 끄고 싶어, 창문도 열고 싶어, 방충망도.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쯤 여름이 끝났다.


어제는 선풍기만 틀고도 무사히 잠에 들 수 있었고 이제 곧 창문을 여는 게 닫는 것보다 시원한 계절이 오겠지. 그래도 아마 나는 창문을 좀처럼 열지 않을 거고 조금만 견디기 힘들면 에어컨을 켜다가 어느 순간 보일러로 갈아타겠지. 방충망을 밀어젖히는 일은 아마 절대 없을 거야. 이렇게 단정짓는 것도 조금 웃긴 것 같아서 가을까지 기다려본 뒤에 이 글을 마무리할까 했지만 그냥 오늘 내로 무조건 해치우기로 했다. 자유로운 여름을 그리던 지난봄, 한국에 가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잔뜩 계획을 세웠지만 내가 7월 2일부터 8월 25일까지 대체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고 다시 그 오두막을 낭만으로 포장하기 시작할 때쯤 여름이 끝났다.


5월의 파리가 말하기를 너 여름복숭아가 맛있단다, 이제는 우기라 부르겠다는 장마에 태풍에 올여름 복숭아 가격이 유독 비싸다. 나흘 전 큰맘 먹고 아삭한 복숭아 팻말 밑에 벌레먹고 못생긴 복숭아들 사이 그나마 멀끔한 두 놈을 육천 원에 사 왔다. 맛이 어땠냐 하면 아직 냉장고 안에 있다. 아, 나는 제철과일이 싫어요!


“수박의 맛이라는 뚜렷한 전조를 가지고 여름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데 어째서 봄은 가을은 겨울은 그렇지 않은지”(1) 박솔뫼 작가의 인물은 궁금해했고 내가 거의 이해하지 못한 내용의 그 소설은 그럼에도 늦여름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실 저 인용문은 내가 기억나는 대로 대충 적어봤을 뿐이고 책은 이미 반납한 뒤여서 글감이 떠오른 몇 시간 전 급하게 도서관에 다녀올까 네이버 지도를 켰지만 오늘이 마침 휴관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고 이 문장이 끝날 때까지는 아직 가을이 오지 않는다는 것처럼 어쭙잖게 그 소설의 문체를 따라해보며 이 여름 끝자락의 여전히 덜 익어 떫은맛을 기억하기로 한다.




(1) 박솔뫼,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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