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피카소가 말한 이 유명한 문장처럼 모든 창작이 기존의 작품을 모방하며 학습한 것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 은유에서 그 대상이 고정된 장물이 아님을, 그 결과물이 한 사람이라는 유일무이한 역사를 가진 몸을 통과해서 나온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똑같은 것을 보고 그려도 사람은 저마다 다르게 그려낸다.
한 사람이 자신이 1초 전에 그린 직선과 똑같은 직선을 그리려고 해도 그조차 미세하게 다른 흔들림, 굵기, 각도 등이 생겨난다. 이것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세상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원동력이며, 예술과 상품을 구분 짓게 하는 보이지 않는 가치이다.
예술은 훔쳐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창작은 공산품처럼 찍어낼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AI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이제 말 몇 마디면 누군가가 인생을 평생 바쳐가며 만든 창작물과 언뜻 동일해 보이는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에 열광한 사람들이 단지 신기함에서 비롯된 놀이라면 이해해 볼 수 있지만 진심으로 동일한 가치를 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면 혼란스럽다.
누구도 조화나 위조지폐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림은 어째서 가짜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들었다가 이내 답도 따라왔다. 누구에게는 조화로도 충분히 원하는 인테리어를 할 테고, 위조지폐 역시 영화 소품 등으로는 쓰일 수 있으니까.
이미 발명된 것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였고 어딘가에 쓰임이 분명히 생기기 마련이다.
AI가 아닌 인간이라서 불편한 감정이 먼저 올라왔지만 이성을 차린다.
세상의 변화는 날씨와 같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나는?
그림 업계에서는 통상 실제 종이 위에 채색 도구로 그리는 작업 방식을 수작업이라 칭하고
손으로 그림을 그려도 태블릿을 가지고 컴퓨터에서 그리는 그림을 CG라 말한다.
그런데 앞으로는 CG에서도 손을 이용한 작업과 키보드를 이용한 작업을 나눠야 할 것 같다.
아니 그 모든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작업이 대세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손으로 그리는 그림이 좋고,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적인' 그림을 더 가치 있게 느끼는 한 사람으로서 아직까지는 이 21세기에 나타난 도깨비 같은 동료와 함께 할 필요성은 못 느끼고 있다.
3D 애니메이션이 나왔을 때 2D는 사라질 것인가 말들이 많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줄어들기는 했어도.
누구나 핸드폰으로 글을 읽는 시대가 되었어도 종이책이나 신문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아무나 뚝딱하고 말로써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손으로 한 땀 한 땀 과정을 쌓아가며 그리는 그림이 사라지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는 속도를 쫓아가기가 점점 버거워 살짝 어지러웠지만 이내 다시 중심을 잡아본다.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