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이 주는 좋은 것 3가지
한 달 살기를 하며 가장 먼저 느낀 건, 매일 반복되는 루틴이 생각보다 큰 힘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새로운 도시, 낯선 언어, 익숙하지 않은 거리와 사람들 앞에서 긴장했고,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은 뭐 하지?”라는 막연한 질문 대신, 우리는 우리만의 리듬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세부에서는 아이가 아침에 어학원에 가면 나는 늘 가던 ‘메르씨카페’에 들러 라테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일기를 썼다. 오후 3시, 아이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마트에서 망고를 사 와 아이에게 깎아주곤 수영복을 챙겨 함께 수영장으로 향했다. 아이는 필리핀 수영선수 출신 선생님께 수영을 배웠고, 수업이 끝난 뒤엔 어학원 친구들과 수영장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며 오후를 보냈다. 신나게 놀고 난 후 개운하게 씻고 저녁을 먹었다. 의. 식. 주 모두가 제공되는 기숙형 어학원이라 엄마 할 일이 하나도 없는 점이 우리의 저녁시간을 좀 더 풍요롭게 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난 뒤 함께 공부를 하고 기숙사 매점에서 망고주스를 사 먹으며 보드게임을 하거나 저녁 내 내 책을 읽고 잠들었다.
시드니에서는 바나나 브레드와 풀크림 우유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런치박스를 챙겨 8시 30분에 숙소를 나섰다. 시드니 시티를 가로지르는 트램을 타고 9시까지 아이를 어학원에 데려다주고 나면, 나는 하이드 파크를 천천히 산책하고 윈야드 쪽으로 걸어갔다. 야외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다이어리를 쓰는 시간이 어느새 익숙한 하루의 시작이 되었다. 오후 3시에 수업이 끝난 아이와 함께 매일 텀바롱 물놀이터에 들렀다. 자주 찾다 보니 같은 시간대에 오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아이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몇 살이야?”, “어느 나라에서 왔어?” 같은 짧은 말들이지만, 아이에게는 작은 용기가 담긴 소통이었다. 5시쯤엔 울월스나 콜스, 패디스 마켓 중 한 곳에 들러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했다. 식사를 마치고 하루 공부를 마친 후에는 우린 달링하버로 산책을 나가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돌아오곤 했다.
오클랜드에서는 밀하우스보호지역이라는 곳에 있는 숙소에서 지냈기에 매일 창가 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함께 기분 좋게 일어났다. 8시 30분까지 학교에 가기 위해 8시에 공원 오솔길을 걸어 나섰다.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언니, 오빠들, 산책 나온 노부부, 조깅하는 사람들 모두가 환한 미소로 “good morning”을 건넸고, 처음엔 쭈뼛거리던 아이도 어느새 “good morning”으로 인사를 시작했다. 이 인사는 어느 날은 “How are you”로, 또 다른 날은 “Have a nice day”로 이어졌다. 아이는 스스로 ‘먼저 굿모닝 인사하기’, ‘하루에 20명에게 굿모닝으로 인사하기’ 같은 미션을 만들어 도전하며 작은 성취를 하나씩 쌓아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나는 동네 도서관에 들르거나 호윅비치 근처의 ‘티룸’에 가서 따뜻한 라테와 스콘을 즐겼다. 단골이 되자 직원과 눈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어느 날 추천받은 초코 브라우니는 정말 잊을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오후 3시, 수업이 끝난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거나 로얄드엘스모어 파크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다. 저녁 무렵 숙소에 돌아와 식사를 하고, 한 시간 정도 공부를 한 뒤, 하늘이 핑크빛으로 물들면 산책에 나섰다. 돌아오는 길엔 울월스나 파킨세이브에 들러 장을 봤고, 와일드위트라는 작은 빵집에서 샤워도우를 사 왔다. 숙소에 와 씻고 나면 우리는 언제나 침대에 나란히 누워 책을 읽다 잠들었다.
이처럼 단순하지만 반복되는 하루는 우리에게 큰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익숙한 길을 스스로 찾아 걷게 된 아이는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점점 그 도시의 한 사람처럼 살아가기 시작했다. 여행자처럼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생활자처럼 그곳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 걷던 학교 가는 오솔길, 자주 가던 놀이터의 그네와 벤치, 도서관의 책장, 매주 열리던 시장, 우리가 좋아하던 작은 빵집까지 모든 것이 우리만의 루틴 안에 자리 잡으며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무엇보다 루틴은 아이에게 예측 가능한 안정감을 주었다. 일정이 익숙해지자 아이는 그날그날의 일상을 기대하게 되었고, “오늘도 수영장 가는 거지?”, “엄마, 그 빵집에 또 갈 거야?” 같은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정해진 흐름 속에서 아이는 공간에 익숙해지고 외국어에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새로운 환경에 서서히 적응해 갔다.
루틴이 있다고 해서 모든 날이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라도 날씨에 따라 풍경이 달랐고, 마주치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 아이의 기분에 따라 매일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났다. 비슷한 하루처럼 보여도, 그 안엔 작은 모험과 성장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우리를 중심 잡아주고 하루를 의미 있게 만들어준 건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바로 이 단순한 일상의 루틴이었다. 한 달 살기의 진짜 매력은 결국 ‘너와 내가 가장 편안한 우리만의 일상’을 낯선 곳에 심어 보는 데 있는 것 같다.
< 아이와 함께 한 달 살기에서 반복적 일상이 주는 장점>
1. 심리적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
낯선 환경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루틴이 생기면 하루의 흐름이 익숙해지면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불안감이 줄어든다. 특히 아이에게는 ‘다음에 무엇을 할지 아는 것’이 큰 안정감을 주며, 새로운 환경에 보다 빠르게 적응하게 도와준다.
2. 현지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기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장소에 머무르며, 같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반복 속에서 여행자는 점차 ‘방문자’가 아닌 ‘생활자’로 자리 잡게 된다. 현지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면서 도시의 결을 느끼고, 그곳의 일상이 내 일상처럼 느껴지는 경험은 단기 여행에서는 얻기 어려운 깊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3. 아이의 정서적 사회적 성장
루틴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그 안에서 아이는 작고 반복적인 성공 경험을 통해 자율성과 자신감을 키워나간다. 아이가 스스로 할 일을 기억하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새로운 도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반복되는 일상 안에서 조금씩 이루어지며 아이의 정서적·사회적 성장을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