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동으로 이사 온 지도 어느새 1년 반이 되었다.
회사 이직과 함께 시작된 궁동살이
늘 하는 말이지만 이곳에서는 잠만 잔다.
시장도 시흥 가서 보고
산책도 시흥 가서 하고
주소도 아직 시흥에 있다.
이곳에서 주로 하는 일을 꼽자면 밤 산책 중 너구리를 만나러 가는 일이다.
우리 부부는 밤 11시 즈음이면 집 근처에 있는 모 학교 운동장을 걷는다.
남들 잠자리에 들 시간에 산책을 나서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가 이름 붙여 준 '궁동 너구리'를 보기 위함이다.
이사 오고 우연히 산책길에 만난 야생 너구리!
처음엔 개(犬) 다 아니다 반신반의했지만 학교 수위아저씨에게 이야기를 들이니 너구리가 맞다. 학교가 개교하기 이전에 학교터가 산이었는데 그때 살던 너구리가 터줏대감처럼 계속 오간다고 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에 야생동물이 있다는 게 처음엔 의아했다. 아마 나처럼 별생각 없이 너구리를 만났다면 목줄 안 한 들개인 줄 알고 지나칠 것 같다.
너구리는 개와는 다른 게 많았다.
두상도, 걷는 본새도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그놈에게 내 맘을 뺏겼다.
마치 신기루를 본 듯
그놈을 만난 밤은 왠지 기분이 좋고, 로또에 당첨된 것도 아닌데 횡재한 느낌마저 들었다.
겨우 잠시 스쳐갈 뿐인데~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은 동물농장에 제보라도 하자고 하지만 너구리와 교감을 나눈 것도 아니고,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스치기만 하는 걸 어찌 제보하냐고 했다. 스토리텔링 거리가 안된다면서.
사실 그 놈들이 어디 사는지?
무얼 먹고 사는지? 몇 놈이나 있는지 궁금하다.
다행히 사람을 만나도 공격하지 않고 가던 길로 걸어가기만 한다.
걸음도 천천히 걷는 법이 없고 늘 분주하다.
맘 같아선 너구리를 만나면 반가움에 덥석 안아보고 싶지만
막상 나타나면 경계가 되고 긴장하곤 한다.
남편이 이런 나를 보고 '너구리만 보면 겁내면서 너구리타령은~‘하며 비웃곤 한다.
보면 좋은데 가까이 가기엔 두려운 존재랄까?
지난달은 오랜 시간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서 걱정을 많이 했다.
어디 아픈가? 이사를 갔나? 혹시 누가 신고해서 죽었나? 등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20일쯤 지나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때 얼마나 고맙고 안심이 되던지.
나는 너구리가 보이지 않는 밤이면 너구리가 자주 출몰하는 곳에서
"너구라~ 너구라 ~보고싶다. 너구라~ 너구라~ 나와라~''하며 동요 부르듯 흥얼거린다.
한 번은 그런 나에게 '그렇게 밋밋하게 부르면 너구리가 나오겠어?
달콤하고 간절하게 불러야 나오지'라고 남편이 훈수를 뒀다.
그 즉시 사랑하는 연인에게 구원하듯 ,'너~구~라, 너~구~라, 보~고~싶~다. 나~와~라~~'라고
부드럽게 고백의 읊조림을 했더니 갑자기 너구리가 쓱 나타나 깜짝 놀란 적도 있다. 거짓말 아니고 진짜다.
또 한 번은 너구리가 우리 걷는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길래 무섭지만 용기를 내어
'너구라 안녕~', 하고 아는 체를 했더니 쓱 돌아서 우리 쪽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사실 그 행동이 일반 들짐승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내겐 충격이고 특별했다.
그 이후에도 몇 번 스칠 때면 마치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걸 알기라도 하듯
흘깃 쳐다보고 간다.
그 순간은 찰나처럼 짧고 주로는 제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시크한 매력이 있다.
비록 나와 특별한 교감을 나누지 않아도 늦은 밤 그놈을 만나러 가는 길은 기대가 되고 설렌다.
어찌 보면 고단한 일상에서 잠시 너구리를 만나는 시간이 희망을 만나러 가는 길 같달까?
보면 좋으면서도 다가설까 두려운 묘한 상태의 희열까지 덤으로 얻으면서 말이다.
가끔 피곤함을 핑계로 밤 산책을 포기하는 날은 남편 혼자 산책을 나가는데 우연인지 평소보다 자주 너구리를 봤다고 자랑을 한다. 꼭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이
어제는 혼자 나간 그이가 카톡 사진을 보내왔다.
'진짜 너구리 봤다고'
그놈을 몇 번이나 렌즈에 담으려고 했지만 매번 쏜살같이 사라져 제대로 담지를 못했다. 찍어 놓고 보면 개인지 너구리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어젯밤 사진은 누가 봐도 너구리같이 나와 잠시 궁동너구리 사연을 전해본다.
오늘 밤도 나는 너구리를 만나러 갈 예정이다.
핸드폰으로 멀리서 찍어 해상도가 낮지만 진짜 궁동너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