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당신
시간을 핑계 삼아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해 다닌, 당신의 지난날을 회상해 봅니다.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저 너머의 그대에게 달려가는 것이 곧 사랑이다.라는 정의를 내리신다면, 구태여 당신은 한 번도 사랑이란 걸 제대로 맞이한 적이 없겠군요. 전 그런 당신을 불쌍하게 바라봅니다. 동시에, 당신을 이기적이고 궁상맞은 사람으로 봅니다. 그런데 문득, 당신을 바라볼 때마다 제 얼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우리 삿포로에 갈까요? 그 말에 담긴 사랑을 당신은 제대로 알고 계십니까? 눈이 잔뜩 내리는 삿포로에서 푹푹 밟히는 눈과 아름답게 가라앉는 눈들 사이에서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것인데 말이죠. 이렇게 퍼붓는 눈에게 묻혀도 좋을 만큼, 기상 악화로 고립이 되어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들이 되는 순간들을 저는 기억합니다. 당신, 이제껏 무턱대고 들이닥친 사람들을 피해 뒷걸음질 치셨죠. 그러다 뒤에 놓인 무수히 많은 돌부리들에 넘어져 많이 우셨죠. 당신은 이제 어디로, 어떻게 걸어가실 건가요?
당신은 카페를 좋아했습니다. 늘 마시는 음료는 아메리카노였지만요. 프랜차이즈 카페보다는 개인 카페를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창가에 식물들이 보이는 곳을 좋아했습니다. 푸른 내음이 무성한 카페, 그중 가장 식물들이 많이 보이는 곳에 앉고 항상 이야기를 나누었죠. 여러 차례 카페에 앉아 당신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언제나 당신은 깊은 상심으로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있잖아, 나는 왜 연애를 하지 못할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앞에 놓인 새까만 아메리카노를 마십니다. 한 모금. 상심이 빠진 만큼. 두 모금. 새까만 저 물들이 당신의 입안을 휘젓고 목으로 타고 갑니다. 창가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어느덧 제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홀로 속삭입니다. “넌, 안 하는 거잖아.”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왔던 순간이 있었죠. 어느 평범한 날, 삿포로가 떠오를 만큼 하얀 눈이 내렸던 날. 아스팔트 위에 하얀 가루들이 올라타던 순간, 당신은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무진장 애썼다고 말해주셨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당신은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늘어놓았습니다. “어차피 떠날 사람이야.” “남들한테도 쉽게 다가갈 것만 같아.” 그렇게 눈 녹듯 떠나가 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다가오는 사람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이유를 달아 떠나보내기를 반복했죠. 이제 와서 물어봅니다. 당신의 마음은 어떠셨나요? 순간의 설렘이 휩쓸고 지나가버린 자리에 흐물 해질 뻔한 편견은 더 견고해져 갔나요? ‘역시 내 말이 맞았어. 어차피 떠나갈 인연이야.’
당신아, 바보야. 오만한 감정에 쉽게 휩쓸린 순둥아. 당신이 지닌 이상한 기준이 당신을 망가뜨리고 있었습니다. 벽 같기도 하고 선 같기도 한 그 기준이 당신의 사랑을 망치고 있었습니다. 전 그런 당신을 볼 때마다 소설,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여자주인공, 엘리자베스가 생각납니다. 엘리자베스는 남자 주인공이 본인을 무시했다고 오해하면서부터 그를 향한 부정적인 편견을 갖게 됩니다. 미워하고 무시하다가, 남자 주인공의 해명 내용이 빼곡히 담긴 손 편지를 받고선 이제껏 본인의 행동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나는 나 자신을 전혀 알지 못했어.” 본인이 공정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감정에 휘둘려 섣부른 판단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전 당신을 엘리자베스처럼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을 거라고 판단해 버리며 사랑으로부터 도망 다니셨죠. 당신의 시야로 본 세상엔 수많은 편견과 억측들이 존재하는 것만 같아요.
당신이 사랑을 피했던 이유는 단순히 시간을 핑계로 삼았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에 대한 두려움, 상처를 피하려는 본능적인 방어기제, 그런 것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자신만의 기준을 고수하며 세상과의 거리를 두었습니다. “어차피 다 떠날 사람들이야”라는 말은 마치 방어벽처럼,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외면하며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 같았습니다.
그 사람들의 진심이 느껴질 때마다, 당신은 그것을 가볍게 흘려보내려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큼 곧이곧대로 믿지 말자. 마음이 가는 대로 녹아내리지 말자. 다짐하며 당신은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주지 않기 위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에게 건네었던 그 말은 결국 제게 돌아왔습니다. “넌, 안 하는 거잖아.” 그 말이 이제는 제게 돌아와 제 마음을 하염없이 찌르고 있습니다. 저도 결국 그저 당신과 같은 사람이었던 거죠. 스스로 만든 벽에 갇혀서, 결국 사랑을 외면한 사람. 사랑을 두려워하고 최대한 멀리 도망가기 위해 애쓴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궁상맞고도 찌질한 사람 더하여 편견 투성이었던 당신은 바로 저였습니다. 엘리자베스를 유난히 닮은 그 사람이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