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존재하게 만드는 말
"000 아빠, 이게 뭐야?"
와이프가 내 전화기를 들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묻는다. 뭔가 건수를 물었거나 화가 났을 때 나오는 목소리 톤이다.
"뭐가?"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여기, 통화목록에 '비타민'이라고 적혀 있는 사람. 이 사람 누구야? 왜 이렇게 통화 횟수가 많아? 누구지?"
취조가 시작되었다. 추상같은 목소리이다. '넌 이제 죽었다.'라는 의미로밖에 안 들린다.
나는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전화번호를 확인해 보쇼."
"010-2 xxx-0 xxx. 어? 하하하."
본인 전화번호다.
머쓱해하는 그녀.
"어쩐지, 통화 수가 많더라니. 역시...!"
역 쉬는 무슨!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넌 이제 죽었다.' 하면서 살을 날릴 땐 언제고.
그녀의 태세 전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내 전화번호 목록에는 가족들의 이름 앞에 호칭을 붙여서 기록해 놓았다.
'미라클 아들', '에너지 딸', '비타민' 이런 식이다.
양가 어머니들 앞에도 그분들의 특징을 표현하는 호칭이 하나씩 붙여져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전화를 걸기 전 통화 대상자의 호칭을 확인하면 그 닉네임대로 상대방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통화를 시작하게 되고 대화가 긍정적으로 흘러가게 된다. 놀랍게도 이 호칭은 전화상의 호칭을 넘어 평소 대화 중에도 가끔씩 등장하며 호칭 대상자를 떠올릴 때마다 거기서 생성되는 에너지와 영향력을 느끼기도 한다.
와이프가 둘째를 낳고부터 아이 둘의 육아에 힘이 부친 나머지, 손에 함포진을 동반한 통증이 시작되더니 결국 2년 연속으로 추간판 탈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때 잠시 아이를 돌봐주실 이모님을 한 분 모시게 되었는데, 성함이 독특하여 잊을 수가 없다. '김 친구' 이모님. 이모님은 이름에 맞게 아이들에게 친근하고 다정하게 다가가서 금세 친해지셨다. 육아와 집안일을 하시면서도 전혀 힘든 내색 없이 아이들을 잘 돌봐주셨다.
이모님은 첫째인 아들을 부를 때 그냥 부르지 않고 앞에 형용사를 붙여서 불러주셨다.
"멋진 오빠!"
항상 그렇게 부르면서 둘째인 딸에게도 멋진 오빠를 소개해 주셨다. 그리고 멋진 오빠답게 항상 멋지게 생활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 후로 오빠는 항상 '멋진 오빠'로 불렸다. '멋진 오빠'라는 호칭의 매직은 오래 지속되었다. 아들이 어린이집에 갈 때 동생에게 한 마디하고 갔다.
"00아, 멋진 오빠 다녀올게."
딸아이가 조금 커서 오빠랑 어울리게 될 무렵, 오빠에게 한 대 맞고 엄마에게 울며 달려왔다.
"엉엉엉, 엄마! 멋진 오빠가 나 때렸어."
딸아이에게 '멋진 오빠'는 항상 함께 불리는 하나의 단어가 된 것이다. 그 이후 오빠를 부를 때는 어김없이 '멋진 오빠'가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아들은 딸에게 진짜 멋진 오빠로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멋진' 오빠가 되기 위해 동생을 잘 돌봐주고, 동생이 엄마가 집에 없다고 울기 시작하면 동생을 위해 종잇조각을 이어서 '엄마 목걸이'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그림도 그려 주었다. 딸은 그런 오빠가 더 멋져 보였는지, '멋진 오빠'라는 말을 더욱 자주, 힘차게 불러주었고, 오빠는 그에 부응이라도 하듯 수시로 동생을 이뻐해 주고 잘 놀아주게 되었다.
대학생이 된 지금도 오빠는 여전히 동생에게 '멋진 오빠'로 맹활약하고 있다. 남들이 볼 때에는 썸 타는 사이로 오해할 정도로 동생이랑 잘 지내고 어딜 가도 함께 다닌다. 딸도 오빠를 누구보다 신뢰하고 최고의 대화 파트너로 인정해 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그 자리에 가면 그러한 역할을 해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자리'는 바로 '호칭'에 대한 것이다. '과장', '사장', '연대장', '사단장', '대통령'...
호칭의 무게는 호칭에게 주어지는 역할과 책임으로 인해 위로 갈수록 더욱 무거워진다.
'왕이 되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디라.'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아들은 가끔 뜬금 능력자로서 '미라클'한 일을 보여주었기에 아들 전화번호에는 '미라클'이라 적어 놓았고, 딸은 우리 가족의 에너지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에너지'라는 호칭을 적어 놓았다. 와이프에게는 그저 '비타민'이라고만 입력해 놓았더니 당사자가 오해를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내 인생의 비타민인 그녀이다 보니 이름을 적지 않았다. 먹고 마시는 비타민보다 훨씬 좋은 비타민을 날마다 공급해 준다.
김춘수 님의 시 <꽃>에 보면, 지은이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존재에게 이름을 불러주었더니 그가 지은이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의미를 가지지 못한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존재는 누군가에게 '의미'있고 '가치'있는 존재로 다가오게 된다. 지은이 또한 누군가가 '자신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길 원하고 있다. 즉, 누군가가 나 자신의 존재와 본질의 의미를 알아봐 주고 그에 맞는 호칭을 부여해 준다면 나는 그 호칭을 부여해 준 사람에게 나의 존재의 가치를 발휘하여 보답을 해 줄 수 있다. 호칭은 표현의 힘으로도 바꾸어 설명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능력자', '복덩이'와 같이 긍정의 에너지와 힘을 줄 수 있는 호칭으로 계속해서 불러주게 되며, 호칭의 대상자는 그 호칭에 맞는 사람으로 변모하게 된다.
일본에서 한 여성을 대상으로 외모의 변화에 대한 실험을 진행한 적이 있다.
[칭찬이 사람의 외모를 변화시킬 수 있다]라는 주제를 가진 실험이었고, 그 결과는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주었다.
일본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통통하고 못생겼다'라고 믿고 있는 한 여성을 선정한 후 그녀에게 이탈리아어 수업을 소개해 주고 거기서 멋진 이탈리아 남자 강사를 지정해 주었다. 그리고 50일 동안 그 남자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예쁘다', '성격이 좋다.'라고 꾸준히 칭찬을 해주었다.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그간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쓰고 다녔던 마스크를 벗었고, 뿔테안경 대신 콘택트렌즈를 썼다. 사진 찍기를 꺼리던 그녀는 사진 찍는 것도 즐기게 되었다. 이후 점점 더 외모에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자존감도 회복되었고, 결국 밝은 성격에 얼굴도 웃는 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의 이름과 호칭을 부르면서 살고 있다. 대부분 호칭의 대상자는 그 호칭에 맞게 반응을 하고 또 그 호칭의 틀에 박혀 살아가고 있다. '대리'이면 대리의 자리에 합당한 만큼 일하고 있고, '부장'이면 부장에 맞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주임'에게 '차장'의 타이틀을 붙여주고 그 자리에 앉히면 얼마 안 가 그 사람은 정말 '차장'에 해당하는 만큼의 역량을 발휘하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대로 '부장'에게 그 타이틀을 뺏고 '과장'의 자리로 내려놓으면 얼마 안 가 그 사람은 과장의 역할만 하게 되거나 조직을 떠나게 된다.
우리 혼자서는 존재감을 느낄 수도 없고, 드러낼 수도 없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존재와 본질, 그리고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 상대방을 통해 내 존재의 의미를 느끼듯이, 우리도 상대방에게 존재감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기왕 호칭을 불러줄 것이면, 매력적이고 꽤 괜찮은 호칭을 붙여주면 좋겠다.
지금 이후 만나는 누군가에게 단순히 이름이나 직함보다는 그 앞에 멋진 호칭을 붙여 불러주면 어떨까? 대상자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지만, 이내 그 호칭에 미소나 웃음을 짓거나 긍정적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 아울러 좋은 호칭을 불러주는 사람도 상대방으로부터 좋은 보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꽃'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당신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