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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 Lion Nov 24. 2023

소중한 인연은 속절없이 짧았다

 어쩌면 우리는 한동안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와 나는 작품을 함께 하며 처음 만났다. 촬영이 진행되면서 언제부턴가 그는 까칠한 나에게 갖은 구박을 다 받으면서도 나를 직책이 아닌 '누나'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하기 시작했고 우린 힘든 현장에서 희로애락과 고민을 함께 나누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하필이면 또 겨울, 날은 추운 데다 현장 분위기까지 좋지 않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현장이었기에 그 친구도 나도 많이 힘들고 지쳤던 터였다. 그래도 결국 어떻게든 촬영은 끝이 났지만, 나는 촬영 말미에 세트장에서 손가락 뼈가 부서지고 탈골되어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여, 촬영이 끝난 뒤 치료를 다니느라 결국 다른 작품에도 한동안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촬영이 끝나고도 그는 내게 틈만 나면 전화했다. 매번 마치 무슨 급한 용건이 있는 것처럼 "누나. 누나!" 다급하게 불렀는데 막상 들어보면 또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다.


"야! 별일 아니면 끊어. “

"너 좀 귀찮거든? 별일 없으면 자꾸 전화하지 마."


그는 내가 이렇게 별일 별일을 외치며 전화를 받아도 바보같이 헤헤 웃으며 "끊지 마! 끊지 마. 누나!" 소리치며 웃던, 타격감이 전혀 없던 녀석이었다.


미안하지만 가끔은 실없는 그 녀석이 귀찮아 일부러 전화를 안 받은 적도 꽤 있다. 그럼에도 우린 언제든 웃으며 만날 수 있고 또 언제든 통화할 수 있는 사이였으니, 짜증 난 채로 전화를 받고도 "누나!"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에 언제 화가 났었냐는 듯이 피식 웃고 넘어가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어김없이 울리는 그 녀석의 전화. 변함없이 귀찮은 티를 실컷 내며 용건만 말하라는 내게 그는 새로 들어가는 영화 크랭크인 소식을 전했다. 당분간 바빠질 테니 전화를 자주 못할 것 같다며 은근히 칠칠맞은 나를 걱정하던 그는 자기 없는 동안 잘 지내고 있으라는 바보 같은 안부를 전하고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뻔질나게 전화해 대던 그 녀석의 연락은 정말로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고 언제부턴가 연락이 전혀 오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 한 달이 지나고, 그리고 몇 달이 지나 결국 해를 넘겼고 먼저 전화 한번 해볼까 싶다가도 잘 지내고 있겠지 싶어 그냥 그만두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나는 그에게 따로 소식을 전하지 않고 프랑스에 가게 되었다.


이민을 결정하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에 있는 나의 흔적을 최대한 다 지우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증발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네이버 영화 서비스에 연결된 내 이름을 삭제 요청했다. 그리고 어차피 잔고도 텅텅 비어있는 안 쓰는 통장들과 주택 청약 그리고 보험을 해지했고, 자주 쓰던 계정의 메일을 해지했으며 가입했던 인터넷 카페들도 탈퇴했고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재외국민 신청도 일사천리로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몇 년을 쓰던 전화번호를 해지해버렸고 덩달아 카톡도 같이 사라졌다. 마치 한국에 존재한 적이 없던 사람처럼 떠나기 전 나의 흔적을 그렇게 최대한 지웠다.




프랑스에 오고 나서는 낯선 나라에 적응한다고 한동안 바빴다. 바쁘게 지내면서도 문득문득 그 녀석이 떠올랐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연락 두절의 이유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기에 그저 이렇게 하나의 인연이 끝났구나 싶어 그 뒤로는 애써 그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끔 보는 스트리밍 서비스에 그 녀석이 참여했던 영화가 올라와 우연히 보게 되었다.


영화를 보아하니 고 녀석 참 일이 많았겠다 싶어 대견하기도 하고 오래전 함께 현장에서 고생하던 일들도 떠올라 문득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먼저 연락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왠지 미안한 마음도 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중을 못하던 사이 영화는 끝이 났다. 그리고 앤딩 크레딧에 그 녀석 이름이나 한번 보자 싶어 올라가는 크래딧을 무심히 보고 있는데...


이건 뭔가 이상하다.


검은 바탕에 하얀 글씨로 무언가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문장이 화면 상단에 올라왔고, 익숙한 이름이 갑자기 내 눈에 확 들어왔다. 갑자기 머리가 멍하고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ㅇㅇㅇ 님의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 녀석의 이름이었다. 순간 멍해지면서 그제야 왜 그 못난 놈의 연락이 갑자기 뚝 끊겼는지, 뒤 따라 엄청난 후회와 설명하기 힘든 고통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믿을 수가 없었지만 수소문해 본 결과 안타깝게도 사실이었다.  


그렇게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에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었다. 그도 그러했고, 그전에 떠난 그도 그러했다.


그들은 조금은 차갑고 까칠하며 자기들을 구박만 하는 내가 뭐가 그리 좋다고, 그렇게도 바보같이 나를 웃겨주고 또 잘 따랐더랬다. 은근 마음 약하고 허술한 나를 늘 걱정하며 곁에서 챙겨주고 그렇게도 잘 따르더니, 자기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누나'를 남겨두고 갑자기 불쑥 떠나버렸다.


아직도 가끔은 그들로 인해 시도 때도 없이 울리던 내 전화벨이, 카톡 알림 소리가 그리고 나를 "누나"라고 부르던 그 장난기 가득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무척이나 그립다. 다시 전화가 온다면 나는 전과 같이 받자마자 "별일 아니면 끊어!"라고 웃음을 참으며 구박할 것이고, 그들은 예전처럼 "누나, 끊지 마요! 끊지 마!"라고 말하며 바보같이 웃을 것이다.




그대들의 누나는 어떻게든 씩씩하게 잘 살다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언젠가 우리 또다시 만나면 예전처럼 여전히 구박은 조금 할지언정 내 그대들에게는 언제든 나의 시간을 기꺼이 내줄 예정이니, 늘 그랬듯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고 또 불쑥 찾아와 주기를.


너무나도 멋지고 또 바보같이 착하기만 하던 나의 사랑하는 못난이들. 이제는 아픔 없는 세상에서 평온하기를.


사랑하는 누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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