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얼빈' (2024)
인간은 참 복잡한 존재다.
단편적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아무리 성인군자 같은 사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며, 쳐 죽일 나쁜 놈도 누군가에겐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빌런'이라고 지칭하는 건 은근히 어렵다.
1900년대 초, 조선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없어지려고 하는 시기를 사는 김상현이라는 남자가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 길이 남는 안중근과 함께 만주에서 일제에 맞서 싸우고 있다.
언제 독립을 되찾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하고 있는 그들의 나이는 고작 30대 초반.
오늘도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일본군과 싸운 김상현은 혹시 그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뭐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이미 이토 히로부미를 쏴 죽여 버리겠다는 안중근과 한배를 탔다.
왜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억눌러 오던 감정이나 생각이 외부의 요인에 의해 둑이 무너지듯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이때 한 번 무너진 균형은 걷잡을 수 없이 깨져버린다.
기차에서 일본인 연기를 하다가 발각된 안중근, 우덕순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은 최선을 다해 도망친다 - 그들이 밥 먹듯이 해왔던 일.
김상현은 일본군에 잡혔다. 그리고 지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이 순간이 그에겐 바로 그 둑이 무너지는 그때이다, 독립운동을 하며 '정말 독립이 되긴 할까,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다'라는 마음이 두려움과 만나 그의 마음을 잡아먹어 버렸다.
그는 일제의 밀정이 됨으로써 빌런이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재회한 안중근, 우덕순은 그의 변절을 꿈에도 모르고 반가워하며 다시 이토를 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김상현의 얼굴은 편안해 보인다, 마치 원하는 바를 드디어 이뤄 후련한 사람처럼 말이다.
일제를 향한 화살은 이제, 반대로 독립투사 동지들을 향한다.
속고 속이는 것이 일상이었던 독립운동 씬에서 그의 변절은 금방 탄로 났다 - 안중근 선생님은 변절자 선별하는 일에도 탁월한 감각이 있었다.
안중근은 성공적인 더블 트릭으로 홀로 하얼빈역으로 향하고, 우덕순과 오늘의 빌런은 채가구역에서 마주한다.
우덕순은 물었다, 왜 동지들을 배신했냐고.
김상현의 대답.
우형은 이런다고 독립이 될 거라고 생각하오? 내가 일제에 우형도 잘 말해 주겠소
자신의 배신에 대한 창피함, 신념을 지키는 우덕순에 대한 자격지심, 그리고 내가 말해주면 너도 살 수 있을 거라는 마지막 남은 알량한 자존심이 낳은 후짐까지. 모든 감정이 저 문장에 다 녹아있다.
그 시각 안중근은 이토를 쏘았다. 그리고 임무 완수 후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영웅으로써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보며 김상현은 무엇을 느꼈을까.
몇 년 후 그를 고문해 밀정으로 만든 일본군 장교가 그를 불러냈다 - 김상현은 그 사람의 따가리로 몇 년 간 살았다.
백범 김구라는 사람을 추적하란다. 김상현은 아무 말이 없다.
장교는 '니 까짓게 개기는 거야'하는 눈빛과 함께 돈을 건넨다.
김상현은 조용히 돈을 받는다. 장교는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이다.
빌런은 갑자기 돌발 행동을 한다, 돈을 받은 손이 아닌 다른 손으로 칼을 쥐고 장교의 목을 찔러 처단한다.
그는 뒤늦게나마 다시 정의를 쫓는 독립투사의 길로 돌아왔다.
무엇이 김상현의 마음을 바꿨을지 알 순 없지만, 그가 빌런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실수까지 용서될 수 있을까,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은 없다지만 어느 정도의 먼지까지 이해될 수 있나.
2025년, 온, 오프라인에서 엄청난 정보를 받으면서 매일 누군가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평가하고 있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