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자립하지 않으면 그 고통의 몫은 성도
목사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도록(행 6:4) 교회는 전임사역자에게 사택과 사례비를 제공한다. 이는 해당 교회를 사역하는 동안 교회가 지는 일시적인 책임일 뿐 장기적이거나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 교단이 대신해 주면 좋으나 바라지 않는다. 아니 바랄 수 없다. 모든 목회자의 생계를 책임지는 건 불가능하니 말이다. 이 말은, 결국 자기 생계는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사역하는 동안 생계 걱정을 벗어나 일시적 안정감을 누리면 누구나 이 사실을 잊게 된다. 그리고 사임할 때가 되면 정신이 번쩍 든다. 난 이 사실을 제법 일찍 깨달았다. 알면서도 대안이 없었을 뿐이다.
생계유지하려고 사역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명받아 가는 길에 생계 감당이 되지 않으면 소명 유지에 장벽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목사에게 ‘소명’이니 ‘사명’이니 운운하며 청빈해야 한다느니 돈 좋아하면 안 된다느니 말하는 것은 잔인하다. 그렇게 말하는 이는 목사가 재정적으로 여유로울 때 사역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친다. 늘 궁핍에 시달리면 생계유지 열망이 목회 열정을 앞서게 되니 말이다. 미련하게도 나 역시 상대의 생계를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든 적이 많았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성결한 삶을 목사만이 아닌 성도 모두가 실천해야 한다면 유독 ‘목사’에게만 모든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목사니까 더 말씀 읽어야 하고, 목사니까 더 기도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리스도인 모두 해야 한다. 목사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고 더 할 수는 있으나, 목사이기에 더해야 하는 건 아니다. 자칫 ‘난 목사가 아니니까…’라는 생각으로 내 행동에 면죄부를 주거나 내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은 가치중립적이다.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물질의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돈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지, 돈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돈의 많고 적음이란 기준으로 목회자의 ‘성결함’과 ‘신실성’을 판단한 것이 사실이다.
목회자 90% 이상이 노후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글을 접한 적이 있다. 그럴 것 같다. 바쁘게 사역하다 보면 노후준비까지 생각하기란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목사가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않으면 그 고통의 몫은 성도가 고스란히 부담한다. 성도의 근심이 되지 않으려면 목사가 자기 앞가림은 해야 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근심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 누구보다 성도가 나 때문에 걱정하는 것은 더욱 마음 아프다. 이것이 경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이다. 잘 살기 위함이 아니다. 부자 되기 위함이 아니다. ‘자립’과 ‘노후준비’를 위함이다. 내 앞가림은 내가 하기 위함이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되기 위함이다.
기도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닌데도, ‘신앙’이란 명분으로 ‘저축’, ‘보험’, ‘투자’ 등의 재테크를 등한시하고, 때론 부정한 것으로 여긴 것은 무척 우려스럽다.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노후까지 책임져 주실 것처럼 가르치는 것 역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것은 내가 쓴 책, ‘냉수 한 그릇’ 저변에 깔린 내 신학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