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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목 Apr 21. 2024

백작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아침은 백작에게는 치명적이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는 성의 모든 창문을 닫고 커튼을 이중으로 쳐서 그 어떤 빛도 스며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성은 무척이나 넓고 많은 방들을 가지고 있었고 하인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백작은 그 모든 일들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그는 먼지가 가득 쌓인 낡은 가구들에 하얀 식탁보를 씌어놓지 않았다. 그 바람에 가구들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하고 흉측해 보였다. 거기다가 성벽 곳곳에 금이 가고 더러운 곰팡이가 펴 있어서 어떤 방에서는 참을 수 없는 악취가 풍겨오고 복도에는 공기가 좋지 못했다. 그렇다고 환기를 위해서 창문을 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창문을 열면 뜨거운 햇빛이 들어와 백작의 몸을 불태워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백작은 한숨을 쉬면서 혼탁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복도를 지나서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그가 자주 쓰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침실과 부엌과 식당, 번역 일을 하고 연구를 하는 서재, 그리고 그가 집을 나설 때 사용하는 작은 뒷문만이 유일하게 이 음산하고 더러운 성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곳이었다.

백작은 부엌에서 어제 먹다 남은 닭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차갑게 얼어붙은 조촐한 닭은 여기저기 성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군데군데 뼈들이 앙상하게 보여서 더욱 초라해 보이는 이 닭은 그는 달군 불판에 다시 구웠다. 그리고는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유통기한이 조금 지난 피가 담긴 병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식당의 기다란 식탁에 놓고 자신도 자리에 앉아서 그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닭을 먹고 피가 담긴 병을 따서 단숨에 마셨다. 그러자 그동안의 피로와 고통 어린 몸에 뜨거운 활력이 솟아나고 온몸에 힘이 돋아났다. 먼지를 뒤집어써서 침침하고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뿌연 안개가 지는 것 같았던 두 눈은 맑아졌고 머릿속이 한결 정리되는 것 같아서 그는 기분이 일시적으로 좋아졌다. 그러나 이내 드는 고민 때문에 다시 기분이 원래의 상태, 즉 우울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맛없는 닭이 그런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서 그는 그만 식당에서 나와버리고 말았다.

그는 어제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위해서 서재로 향했다.

서재로 향하면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상기하면서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한 없이 초라한지 느껴져서 이만 부끄러워졌다.

아주 오래전에 그는 화려한 성과 수많은 하인들, 빛나는 샹들리에 밑에서 귀족들을 맞이하는 영광스러운 백작이었다. 동시에 모든 존재들의 공포의 상징이자 두려움의 대상이며 밤을 지배하는 거대한 존재였다. 그는 밤에 무도회를 지배했으며 오직 밤에만 활동했다. 그리고 낮에는 잠을 자고 성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의 성정과는 반대로 밤에 잠을 자고 낮에 일어나 일을 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수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서 재산이 폭락했고 성의 유지비나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서 파산위기에 처하게 됐다. 덕분에 그는 오랫동안 함께해 왔던 하인들을 성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가장 그와 가까웠던 하인이자 집사였던 하워드는 눈시울을 붉히며 한때는 경외스럽고 강력한 초자연적인 존재였으나 지금은 파산으로 허덕이고 있는 이 불쌍한 주인을 위해서 작은 선물들을 주고 갔다.

첫 번째는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었는데 하워드는 독서를 즐기는 상당한 애독가이자 지식인으로서 친분이 있는 출판사와 작가들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고대어에 상당한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아는 출판사로부터 도움을 구해 백작에게 번역가의 일을 주었다. 그래서 백작은 그때부터 고대의 문헌들을 번역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낮에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출판사로부터 항상 낮에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백작은 그 일을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했다.

두 번째 선물은 바로 피를 구할 수 있는 곳과 연결을 해 준 것이었다.

백작은 주기적으로 피를 섭취하지 않으면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오랫동안 피를 섭취하지 않을 경우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하워드는 주인이 그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특유의 기지를 발휘해서 자신이 그동안 저금했던 막대한 금액 중 절반을 혈액은행 설립에 후원했다.  

이것으로 백작은 하워드가 후원한 혈액은행에서 소량의 혈액을 꾸준히 기증받을 수 있게 됐다.

몇 시간 동안 번역 일을 마치고 그는 허기진 배를 다독이고는 스그머니 뒷문으로 향했다. 거대한 성문인 정문을 사용하지 않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아마 이제는 녹슬어서 열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여름임에도 두꺼운 외투를 몇 겹이나 두르고 그 위에 빛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는 검은 망토를 두른 후에야 성 밖을 나왔다. 찌는 듯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땀이 찼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겨우 도착한 혈액은행. 그곳에서 그는 소량의 혈액을 얻었다. 그리고 곧바로 성으로 향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두려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두려웠고 온갖 알 수 없는 사물들, 자신의 성보다도 높게 솟은 건물들이 두려웠다.

백작은 자신이 무엇하러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걸까? 나는 어떤 유능한 박사에 의해서 죽음을 맞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죽음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그에게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박사는 나를 살려줬고 그 대가로 나는 몇 백 년 동안 성 밖으로 나오지 못했지. 그런데 그러는 동안 나는 완전히 몰락해버리고 말았어.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낡아빠지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는 성과 빚더미뿐이야. 도대체 나는 왜 그때 그렇게 굴욕적인 선택을 한 걸까?”
 성으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외투를 벗어던졌다. 그러자 시원한 바람이 그의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백작은 가지고 온 신선한 피를 냉장고에 넣었다.

“조금은 아껴 마실걸......”

백작은 다시 서재로 힘 없이 걸어가서 하던 작업을 마저 하기로 결심했다.

밤이 되고 백작은 침대에 지쳐 쓰러지면서 잠에 들었다. 그는 잠에 빠져들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어.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지. 그러나 나는...... 분명하게 살아있어!”

백작이 잠에 들고 창밖에는 칠흑 같은 밤과 푸른 달빛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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