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해변의 묘지- 폴 발레리
언제나 해변은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3월의 한적하고 조금은 쌀쌀하지만 확실히 봄인 어느 흐린 날에 스케치북을 들고 바닷가를 걸었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푸른 파도와 창백한 모래에 부딪쳐 생긴 새하얀 거품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서 어떤 노인이 바다를 향해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바다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이봐! 이쪽으로! 이쪽으로!”
노인이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영문을 알 수가 없어 가만히 멀찍이서 멈추어 섰다. 노인은 계속해서 바다를 향해서 마치 화가 난 것처럼 고함을 질렀다.
“이쪽이라니까!”
‘무엇이 이쪽인 걸까?’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나의 마음은 지나치게 겁이 많았고 심약했다. 나는 할 수 없이 호기심에서 점차로 두려움으로 바뀐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려고 했다. 그 순간, 노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여태껏 불던 바람이 일시에 멎은 것처럼 고요해지고 숨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조금 지나자 다시 바람이 피부를 때렸고 하늘에서 코로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모래에 점점이 얼룩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스케치북이 젖는 것이 싫어서 몸을 앞으로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렸는데 뒤에서 말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이 눈앞에 있었다. 그는 녹색 코트를 입고 주머니는 해져 있었으며 곱슬인 백발이 다소 보기 흉하게 고슴도치처럼 뻗어 있었다. 주름이 나이테와 같이 투박하고 딱딱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나무로 만든 조각 같았다.
“무슨...?”
“혹시 고래를 본 적이 있나요? 분명 여기에 있었는데 아까도 지느러미가 보였던 것 같단 말이지.”
“고래라고요?”
“그래요. 오랜 친구였는데 갑자기 떠난다고 하더니 자취를 감췄지 뭐예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였는데 이렇게 갑자기....”
노인은 딱딱해 보이는 주름을 움직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모래가 얼룩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나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말이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오랜 친구였던 고래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고래는 애초에 바다에서 살지 않는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 노인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고래는 처음부터 그와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걸음을 걸으려 했다.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늘에 거대한 구름이 덩어리 져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천둥소리가 났다.
“저기요. 잠깐만 나를 좀 도와줄 수 있나요?”
노인이 말했다. 우리는 함께 해변에서 가깝고 내 집에서도 가까운 카페로 갔다. 이곳은 낮에는 카페를 하고 밤에는 술집인 곳이었다. 주인은 다소 험상궂게 생긴 체구가 작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진 거친 억양을 가진 사내로 바닷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벤이었다. 본명은 아니라고 한다. 그와는 내가 자주 카페에 들락거렸기 때문에 어느 정도 면식이 있는 사이였기에 내가 노인과 함께 비를 피해서 들어오자 반갑게 특유의 거친 억양으로 인사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불친절하고 무례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이미 적응했고 노인도 벤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고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나는 코코아를 시켰고 노인은 커피를 주문했다. 벤은 최근 들어 기계가 말을 잘 안 듣는다고 거친 억양으로 말했다. 그래서인지 정말로 그가 화가 난 것 같았다. 카페에는 우리 말고도 몇 사람 더 있었는데 모두 어부들이었다. 그들은 낮부터 위스키를 넣은 커피를 홀짝이며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벤이 시끄러운 것과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창밖에는 비가 거세지고 있었다. ‘우산은 벤에게 빌러 야하나’ 하고 잠시 딴생각에 몰두해 있을 때 잠시 카페의 나른한 분위기와 어두침침한 색채, 벤의 거친 억양 탓에 잊고 있었던 노인이 불쑥 말을 했다. 그는 아까보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진지하게 말했다.
“고래의 이름은 멜리입니다. 큰 덩치에 비해서 소심하고 겁이 많은 고래였지요. 꿈이 무척이나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답니다. 그런데 워낙 겁이 많다 보니 정작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멜리와 나는 아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고 때로는 무척이나 기발하고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멜리는 그럴 때마다 큰 열정을 보이면서 자신의 꿈을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지요. 행복했죠. 가끔씩 멜리는 미친 듯이 화를 내거나 슬픔에 젖어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유쾌한 분위기였어요.”
노인은 한숨을 쉬면서 방금 나온 커피를 홀짝이다가 그만 사례가 걸려서 켁켁댔다. 붉게 달아오른 목이 따갑게 울부짖었다. 나는 가만히 노인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고 있었다. 어부들은 어딘가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멜리.... 고래.... 소심하고 겁이 많은... 그러나 꿈이 많은 “
나는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이곳에 특이한 고래가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소문에 의하면 멜리는 노래도 부르고 그림도 그리고 춤도 춘다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노인이 진정이 되었는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벤이 물을 가지고 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창문을 바라보며 ”천둥이 치는군. “이라는 말만 했다. 나는 그의 배려를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물을 힘겹게 마시는 노인을 보자 그가 가엾게 여겨졌다. 멀리서 빗소리가 들리고 이따금씩 천둥이 쳤다. 노인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평화로웠습니다. 서로를 잘 았았고 불화나 갈등도 없었죠. 아주 예전에 딱 한번 제가 실수로 낚싯바늘을 놓치는 바람에 멜 리가 그만 그것을 삼켰을 때를 빼곤 말이죠. 그런 멜리 자취를 감췄습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징후도 없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
노인이 마치 말도 안 되는 사고가 벌어지고 난 후에 그것을 망연히 바라보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에게 멜리는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단 한순간도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
”저기... “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벤의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속삭이듯이 노인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저기 고래는 원래 바다에서 살잖습니까?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요? “
그 말에 노인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물을 마저 다 마셨다. 그리고는 번쩍이며 지상을 때리는 천둥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멜리는 태어나서 이곳에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바다에 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겁이 많았고 바다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거기다가 솔직히 말해서 멜리는 헤엄을 잘 치지 못합니다. “
노인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 노인은 무언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멜리는 겁이 많지만 꿈도 많다. 꿈을 위해서는 바다에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바다로, 광활한 미지의 바다로 말이다.‘
”멜리는 저 없이는 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항상 제가 옆에 있었으니까요. 그는 외로움을 잘 탔죠. “
천둥이 또 한 번 쳤다. 나는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과거에 나는 멜리처럼 겁이 많았고(비록 지금도 많지만)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내가 태어난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마을 밖의 모든 것은 사악하고 무시무시하며 괴로운 무언가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도 꿈이 많았다. 언젠가 나는 기적을 꿈꾸며 과감히 바다로 뛰어든 금붕어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걱정이 돼서 너무 무섭습니다! 지금이라도 어쩌면 멜 리가 돌아왔을지 모릅니다! 서둘러 가 봐야겠습니다! “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빗발이 휘몰아치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나는 그를 말렸다. 그리고 한번 떠오른 과거가 또 다른 과거를 잡고 그렇게 계속해서 과거로의 모험을 떠난 것처럼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선명하게 내부에서 떠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노인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언덕에서 언덕으로 힘 없이 걸어 다니며 꿈을 놓치지 않으려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고심하고 괴로워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과 열망이 나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나의 아버지는 말했다.
”세상은 너무 위험하고 나는 너를 너무 아끼고 사랑한다. 나는 네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믿었지만 결국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떠난 것이다. 눈물짓는 아버지에게 ’ 네가 가면 나는 어떻게 사니?‘라는 표정을 짓는 아버지에게 포옹을 하고는 여행을 떠났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고통과 실패를 경험해야 했고 그로 인해서 포기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나 그럴 때마다 바람이 불어왔다. 아무리 괴로워도 멀리서부터 유유히 찾아오는 바람이 나를 일깨워주었고 삶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바람과 같은 방향에서 바람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 아닌 바람의 반대 방향에서 직접 바람과 부딪치는 것, 바람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 그것은 성장이었다. 성장은 바람을 딛는 과정이다.
바람과 마주하다 보니 나는 어느새 이곳에 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노인은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나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고 그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나는 말했다.
”잠깐만요. 멜리는 여행을 떠난 겁니다. 꿈을 위해서 더 이상 겁을 먹지 않고 바람을 맞기 위해서 떠난 겁니다. “
”그게 무슨 소리요! 멜리는 내가 없으면 안 됩니다! “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멜리는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오히려 당신이 멜 리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
”제발.... 저를 좀 놔주십시오. 나는 찾으러 가야 합니다. 그래요. 나는 멜리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항상... 항상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눴고 우리는 때때로 아주 기발한.... 생각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런.... 생각을 했었단 말입니다! “
노인은 거의 울먹이면서 말했다. 나는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현재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지금도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가끔씩 편지를 쓰고 아버지도 나에게 편지를 보낸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에는 내가 떠날 때의 괴로움도 외로움도 슬픔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아버지를 걱정하기도 했다. 아버지도 성장을 한 것이다.
추억 때문인지 나는 온화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노인의 팔을 놓아주었다. 노인은 힘이 풀렸는지 자리에 주저앉아 훌쩍거렸다. 그는 여전히 비애에 잠겨 있고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벤이 물 한 잔을 더 가져오더니 거친 억양으로 말했다.
”제리 그만해! 멜리도 이제 독립해야지! 언제까지 이런 좁아터진 데에서 살아! “
나는 벤을 쳐다보았다.
”멜리는 자네를 잊지 않아! 그러니 걱정 말게. “
벤이 거의 고함을 치듯이 말했지만 거기에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에서 느껴지는 유대감에서 비롯된 친근감이 있었고 따뜻함이 있었다. 나는 다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멜 리가 편지를 할 거예요. “
나도 따뜻함을 담으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제리는 코를 훌쩍이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창밖에는 비가 그쳐 있었다. 조금 거친 소나기였던 모양이다. 나는 이 틈을 타서 카페를 나왔다. 나오면서 나는 다시 한번 제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고 벤에게는 인사를 했다.
집으로 가면서 나는 바다를 보았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여서 바다가 한껏 성나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무언가 거대한 것이 지나간 자국이 보였다. ’ 걱정이 된 멜 리가 잠깐 망설인 건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갑자기 어디서 왔는지 모를 영감이 떠올랐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