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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real Apr 03. 2023

오늘은, 치앙마이로 출근합니다. #2

"이이이이잉, 이이이이잉, 이이이이잉"


핸드폰이 진동 소리에 맞춰 내 멱살을 쥐고 흔들어 깨운다. 서울이든 치앙마이든 평일 아침은 핸드폰 알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기분에 점수를 매겨본다면 0으로 시작하는 하루. 더 이상 내려갈 것 없는 0으로 시작하는 게 오히려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감고 있던 눈을 뜬다.


바뀐 잠자리 탓인지, 진동으로 기상알람을 맞춰 놓아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까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내 윗사람이 밤새 코를 골아대서인지 잠들지 못하는 새벽. 지금 잠들면 내일 아침 7시에 무음+진동으로 맞춰진 알람으로는 절대 일어나지 못할 거란 확신이 강해지며 관에 누운 시체처럼 몸을 똑바로 하고 누워 핸드폰을 두 손으로 꼭 쥐고 가슴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 누워있으니 정말 나에게 주어진 이 1층 침대가 관짝 보다 아주 약간 더 클 뿐인 것 같기도 하고. 브랜드는 없지만 유명 침대 브랜드를 만드는 공장에서 똑같이 만들어 광고와 중간 마진을 없애 싸게 판다는 광고를 보고 산 퀸 사이즈의 내 방 침대가 아니라 기지개는커녕 발 끝이 벽에 다을락 말락하는 커튼만이 개인 공간을 지켜주는 관짝 같은 이곳에서 나는 왜 자고 있는지.


나만 이렇게 투덜대고 있는 건가. 내 윗자리의 하와이안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니던 백인 남자는 밤새 코를 고는 걸 보니 잘 자는 것 같다. 내일은 잠자리가 좀 불편해야 할 텐데. 내 침대 옆, 캐리어 가방 두 개가 겨우 들어갈 너비의 복도를 지나 1, 2층에서 자고 있는 태국인 커플과 오른쪽 대각선 1층 침대에서 자고 있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성은 다들 잘 자고 있는 건지 궁금해질 찰나.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이이이이잉, 이이이이잉, 이이이이잉”


한 숨도 못 잤다. 정말 한 숨도.


이게 베케이션이라면 귀에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에서 숙면 음악을 검색해 최상의 숙면을 할 수 있도록 뇌파를 조절해 준다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다시 눈을 감았겠지만 나는 지금 워케이션을 왔기 때문에 한국에서와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 피곤한 상태로 일어나야 한다. 분명 코로나가 터지기 전 20대 때는 8인실이 아니라 이게 개미굴인가 싶은 24인실에서도 잘만 자고 몇 달 동안 잘만 지냈는데. 이게 바로 노화인가 하는 생각에 피곤함도 모자랐는지 자괴감까지 얹혀진다.


다른 사람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일어나 샴푸와 폼클렌징, 바디워시, 칫솔 세트를 넣어 놓은 비닐 봉다리를 부스럭부스럭 꺼낸다. 새 수건을 받으려면 100밧을 내야 한다는 말에 어제 쓰고 잘 널어놓은, 그러나 전혀 마르지 않은 수건을 들고 한층 아래에 있는 공용 화장실로 내려간다. 도시보다는 자연을 더 느끼고 싶어 방콕이 아닌 치앙마이로 온 건 맞는데 샤워실까지 하늘이 뚫려 있어 자연을 느끼며 씻을 줄은 몰랐다. 비가 오면 좀 더 빠르게 씻을 수 있겠는걸.


샤워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또 조심조심 캐리어를 열어 외출복을 찾는다. 남자방이 아닌 혼성 믹스방이라 옷을 들고 관짝보다 조금 더 큰 침대로 다시 들어와 커튼을 치고 낑낑대며 옷을 갈아입는다. 밤새 에어컨을 틀어놔 입고 잔 긴팔과 긴바지를 벗고 반팔과 반바지로 갈아입고 양말까지 신으니 아직 하루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치는 기분이다. 휴대용 가방에 3kg가 조금 안 되는 노트북과 충전기를 넣고 드디어 방을 나선다. 조심조심.


아직 모두 잠들어 있는 8인실 도미토리의 문을 조용히 열고 나와 에어컨이 없는 복도와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역시 에어컨이 없고 창이 활짝 열려 야외라 할 수 있는 로비에 앉아 노트북을 켜니 이미 벌써 땀범벅이다. 왜 여긴 에어컨은 없고 문은 다 열어놓은 거야. 베케이션이면 안 생겼을 짜증이 워케이션이라 또 생긴다. 그러다 내 옆에 앉은 유럽인 같이 생긴 유럽인이 모닝커피와 토스트를 다 먹더니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내가 생각한 워케이션은 아침부터 땀과 담배 냄새에 절어가며 시작하는 하루가 아니었는데. 치앙마이로 워케이션 온 걸 부러워하는, 가정이 있는 팀원들한테 얼른 이 얘기를 해서 위로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어제저녁에 자려고 누워 유튜브를 보는데 중간중간 멈출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출근 체크를 하기 위해 회사 사이트에 접속하는데 로그인이 되지 않는다. 크롬 브라우저의 탭에 로딩 인디케이터가 계속 계속 돌아간다. 내 초조함이 인디케이터가 돌아가는 속도만큼이나 급해졌을 때 드디어 로그인 페이지가 열리고 출근 버튼을 누르니 겨우겨우 8시 30분. 카페인이 절실한 8시 30분이지만 이 호스텔 주변에는 맘모스 커피도 메가 커피도 벤티도 없다. 뭐라도 마시지 않으면 코드를 한 줄도 쓰지 못할 거 같아 그랩 앱을 열어 망고주스와 망고밥을 배달시킨다. 여행 와서 배달앱을 쓰는 게 나 스스로도 민망해지려다가, ‘그래 한국에 망고밥은 없잖아’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order 버튼을 누른다. 배달비가 500원이라니. 이제 아침마다 배달이다라는 다짐과 함께 그럼 도대체 라이더는 얼마를 버는 거야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데일리 미팅 시간이다.


매일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팀원들이 모두 모여 15분간 그날의 업무와 이슈를 공유하는 데일리 미팅. 팀장님부터 시작한 업무 공유가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이슈를 빠르게 공유하고 내가 얼마나 좋은 곳에서 멋진 경치와 좋은 커피를 마시고 있는지 자랑을 해야 했는데 왜 내 옆에는 담배 피우는 여행객뿐이며 호스텔 1층의 불편한 로비 자리에서 이러고 있는 건가.


회사는 올해부터 자율출퇴근제를 도입했지만 코워킹 타임이 있어 10시 30분까지는 출근을 해야 한다. 태국의 시차를 적용하면 출근시간은 8시 30분. 모처럼 워케이션을 왔는데 프랜차이즈 카페는 갈 수 없어. 현지 사람들이 가는 힙한 카페에 가서 시그니처 메뉴를 시키고 나도 한껏 인상 찡그리며 일을 하고 와야지. 여행은 살아보는 거라잖아. 일상을 산다는 건 기본적으로 무료하고 하루 8시간의 노동을 피곤하게 이겨내는 거니 현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가는 카페에서 스트레스받아가며 일을 하는 것이야 말로 여행의 정점이라는 생각으로 떠나온 워케이션이지만 역시 여행은 그렇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8시 30분까지 출근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8시까지는 카페에 들어가 메뉴도 주문하고 와이파이도 체크해야 하는데 현지의 힙한 카페들은 역시 모두 장사가 잘 되는지 빨라야 10시, 어떤 카페는 1시부터 영업을 하기도 한다. 힙한 카페가 아니라 스타벅스도 빨라야 10시에 문을 연다.


그래서 나는 목과 허리 디스크가 걸리기 딱 좋을 높이의 책상과 누가 설마 여기서 7시간을 앉아 있겠냐는 생각으로 놓인 의자에 앉아 일을 시작한다. 코쿤캅을 외치며 배달 온 망고주스와 망고밥을 허겁지겁 받아와 먹으며 워케이션 이거 맞아?라는 생각으로 워케이션의 첫날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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