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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영호 Jul 03. 2024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2024년 7월 3일 수요일

모세의 율법에 따라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 심판하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어른부터 그 자리를 떠나고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는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죄의 의미는 무엇일까? English Standard Version에서는 Condemn(비난하다, 선고를 내리다), Easy-to-Read Version에서는 Judge(판단하다, 재판/판결하다)라고 되어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죄’란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는 죄인으로 낙인찍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죄 자체를 용서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에게 죄를 뉘우치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과도 연결된다. 존엄성이란 개인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사람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타인에 대해서는 언제든 존엄성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죄만 비난하고 그 죄를 지은 사람을 진심으로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 자신도 빛과 어둠이 혼합된 존재로서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에 죄지은 자를 정죄할 자격이 없다며 물러설 수 있을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방을 닦아 더러워진 걸레로 탁자를 닦는 여인의 모습은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이 떠오르게 한다. 타인의 악행으로 내 마음에 증오와 복수심이 드리워진다면 결국 내 영혼도 악해질 수밖에 없다.


윌리엄 폴 영의 소설, ‘오두막’은 타인의 악행이 한 가족을 어떻게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지, 어떤 길이 진정 올바른 길인지 말해준다. 어느 날 막내딸이 살해되고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그 사건 이후 행복했던 그 가족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어떤 일을 계기로 범인을 잡아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던 그 아이의 아버지는 결국 얼굴도 모르는 그 살해범을 용서하게 된다. 그 용서는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딸아이와 남겨진 가족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위한 용서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야기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내가 만약 그와 같은 끔찍한 일을 당한다면, 과연 그 범죄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솔직히 어려울 것 같다. 빛과 어둠이 얽히고설키고 충돌하며 내면이 혼돈과 혼란에 빠져 오랜 세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지키기 위하여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흐르는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 삶 속에 깊이 새기고 살아가야 하는 진리라고 믿는다.


이 세상에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특히 인격이라는 것이 그렇다고 본다. 그러나 신념을 가지고 어떤 길을 꾸준히 가다 보면 내가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삶 속의 작은 일부터 순종의 자세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어느 날 영혼과 몸이 하나에 가까워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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