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의 하루 일과 속 아이들을 들여다보면 마치 희로애락이 담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다. 때론 해피엔딩 그 자체이며, 때론 새드엔딩을 막고자 애쓰는 막장 드라마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전지적 시점에서 관찰하다 보면 피식 웃음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은 칭찬샤워를 하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며 내일을 기약한다.
그중에서 제일 흥미 있는 관전포인트는 당연지사 그들의 전유물인 자유놀이 시간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놀이는 놀이가 아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정하고 주도적으로 놀이하는 시간인만큼 교사인 나는 완벽한 '을'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매일 주인공들께서 놀이가 만족스럽고 가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열심히 지원하고 있다.
가을 초입의 어느 날, 아이들은 교실에서의 가을캠핑과 나들이 놀이에 흠뻑 빠져있었다. 집에서라면 한 번도 펼쳐 본 적도 없는 원터치 텐트를 하루에도 몇 번이고 펴고 접으며 나도 왠지 나들이 온 것 마냥 신이 난다. 아이들도 같이 놀이한 지 반년이 지난 지금 손발이 척척이다. 테이블을 포함한 각종 음식과 도구 등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세팅된다. 정말 놀이에는 도가 튼 아이들이다. 그리고 서로 질세라 자신들의 역할을 공표한다. 권위와 출세는 본능인지 아이들은 너도나도 누군가를 부릴 수 있는 역할을 맡고자 한다. "난 아빠", "난 엄마", ""형","삼촌"에 이어 역할이 부족하면 급기야 강아지와 고양이까지 조달된다. 그렇게 역할이 모두 정해지면 본격적으로 한 편의 드라마인, 놀이가 시작된다. 그날은 캠핑 놀이 속에서 자연스레 글자 쓰기와 숫자 빙고까지 확장되어 이어진다.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외치며 "놀이가 더 심화되고 풍성해지도록 시간을 줘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때마침 유려한 춤솜씨를 가진 여자친구들이 공연을 제안하였고 나는 '가을 축제'라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학기 초에 동생반 앞에서 노래를 뽐내었던 경험이 있어서 인지 아이들은 함께 즐길 무대를 뚝딱 만든다. 색종이에 숫자를 쓰고 의자 뒤에 좌석번호를 붙이는 아이, 장난감을 가지고 오지 말라는 상징을 표시하고 안내하는 어린이, 무대에 오를 채비를 하며 색깔 빨대로 '인이어 마이크'를 만들어 내는 위대한 아이들까지... 마지막으로 나에게 음악을 요청한다. "선생님~엄마 퀸카 틀어주세요"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관객이 없다. 모두 무대에 올라가 있다. 그래서 급히 순서를 제안하고 관객몰이를 한다.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도 극적 타협이 이뤄져서 몇 명의 관객이 생겼다. 우여곡절 끝에 스피커 밖으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아린이의 노래와 댄스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뒤에서 전통부채로 예쁜 배경효과까지 주는 하은이... '아... 너희 좀 놀이할 줄 아는구나... '뿌듯한 순간이다.
남기고 싶은 아이들의 놀이순간을 기록하고자 영상을 켰더니 카메라의 프레임 속에서 아이들의 놀이가 더 잘보인다. 카메라 속의 아이들 모습때문에 피식피식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앞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다가 어느 순간 장난감 마이크를 던지고 춤을 추는 아이, 춤을 빛내주기 위해 부채로 보조하는 매니저 같은 아이, 의자에 앉아서 장난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공연관람 중이라고 통화하는 아이, 박자를 맞추기 위해 악기를 가지러 일어나는 아이, 스카프를 뒤집어쓴 아이, 그리고 살짝 일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놀이로 이동하는 모습까지... 이렇게 집단독백적일 수가 없었다.
집단독백은 유아기의 특성으로 집단에 있는 아이들이 전부 자기 말, 독백을 하는 것으로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카메라 속 아이들 모습 또한 집단독백놀이처럼 보인다. 어느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각자가 하고 싶은 놀이들에 진심이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로웠다. 부모님을 모시고 공연을 하기 위해 각을 세워 앉고 박자를 맞추는 것이 아닌, 정말 본능에서 뿜어져 나오는 흥에 겨운 놀이와 모습들 속에서 아이들의 가진 능력들이 빛발 하는 순간이었다. 다만, 집단 독백과 다른 것은 그 속에서 놀이가 된다는 점이다. '진정한 놀이라는 것은 이것이구나. 역시 우리는 흥의 민족이었어.' 부족할 게 없는 행복한 찰나였다.
두둥! 그때 멀리서 지켜보던 한 남자아이가 들뜬 목소리로 외친다. "선생님~이거 보세요~!!예쁘죠?"그리고는 무대 위로 투척되는 반짝이는 스팽글들... 조연출의 무대 연출이자 스팽글 난입사건이다.
'아...그래, 무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처럼 예쁘구나..."마음속의 말이 입 밖으로 쉽사리 나오진 않는다.
무대가 중단될까 새가슴으로 일단 지켜본다. 그런데 이번엔 통째로 가지고 와서 스팽글을 무대 위 아이들 쪽으로 화려하게 뿌려준다. 마치 결혼식 버진 로드의 마지막을 장식할 때의 움직임과 같다. 클라이맥스임에 틀림없었다.
흔들리는 영상 카메라... 고민의 순간이다.
그때 외쳐주는 가수 어린이, "선생님! NG, 음악 좀 꺼주세요."
나는 나의 내면과 대화한다. 해피엔딩 이어야 해... 급하지 않은 척 급하게 다가가 중재한다.
"자~ 00이가 친구들을 더 뽐내게 해주고 싶었구나. 그런데 친구들이 밟고 넘어질 수 있으니 같이 정리하자." 다음번에 무대 위로 뿌릴 수 있는 무언가를 사 오기로 약속하고 말이다.
그렇게 위기를 극복하고 그날의 놀이는 성황리에 마무리된다. 다행히도 해피엔딩이었다.
다음날 만난 아이들은 놀이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인지 다들 꽤나 피곤한 표정을 짓고 등원했다.
인사 나누기를 한 후 어제의 영상을 큐알코드에 담아 온 것을 안내한다. " 혹시 어제 영상에 모두가 찍힌 것은 아니니, 오늘 공연을 해보고 싶은 어린이들은 더 해도 좋아요. "라고 전한다.
그때, 우리 반의 선비라 불리는 차분한 우진이가 빨대에 보석 스티커까지 붙여서 인이어 마이크를 열정적으로 만들어 왔다. 양손에는 부채를 들고서 말이다.
뜨거웠던 그 가을날, 우리는 각본 없는 놀이 속에서 또다시 열정을 불태우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