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살면서 한국이 문득 그리워지는 날이면 유튜브로 한국어 컨텐츠를 하루종일 틀어놓고 삽니다. 그런데 요새 들리는 컨텐츠 중에 혼자 살고 싶어하는 한국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귀에 들어오더라구요. 주로 대학 때부터 독립해, 가족이 그립고 친구가 그립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밴쿠버 젊은이들과는 달리, 나만의 공간, 나한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한국의 이야기들에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저 또한 한국에서 사는 동안,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 절실하다 느끼며 독립을 결심했었습니다. 제가 혼자 살고 싶었던 이유는 나한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고, 내 마음대로, 나답게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함께 살면 편한 점도 많지만, 결국 누군가에게 맞추어야만 하고, 누군가한테 물들어야만 하는 생활이기도 하거든요. 내 자아가 확실히 서지 않은 상태에서는, 누군가한테 물드는 일이 나를 침범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독립해서 혼자 살면서, 나 혼자 일상을 꾸려가는게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혼자 나와 살면서 마냥 좋기만 하다는 사람은 아직 본적이 없는 것 같네요. 꿈꿨던 나만의 공간이 생기고 나면, 월세, 관리비, 식비 등을 전부 알아서 해결해야 하고, 밥도 청소도 빨래도 모두 혼자 처리하는 데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매달 월세가 통장에서 쑥쑥 빠져나가는 걸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점차 방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되고 매주 이마트에서 맥주를 사와 냉장고를 채우며, 내가 정말 독립적인 한 개인이 되어 가고 있다는 자신감도 차올랐던 기억이 나네요.
독립하고 가장 힘들었던 건, 어느 날엔가부터 나를 짓누르기 시작한, 혼자 사는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짙은 적막함이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데도, 귀가 찢어지는 듯한 그런 적막함 있죠. 그래서 집에 있는 시간이 점차 싫어져 카페로 가거나, 산책을 하거나, 헬스장이라도 다니며 그 적막함을 피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집에 있는 동안에는 텔레비전을 쉴새 없이 배경으로 켜두기도 했었습니다. 아무 말소리나 듣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제가 독립을 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신경이 예민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한테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기보다는, 내 신경계가 과자극된 상태에서 다시 안정된 상태로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서, 조용한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아니까 덜 힘들지만, 그 당시에는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절박했었습니다. 거슬리는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저처럼 신경이 예민한 경우 이외에도, 함께 사는 사람이 쉽게 화를 내거나 감정 기복이 심한 경우, 혹은 나와의 경계를 존중하지 않고 자꾸만 자극하거나 비난하는 경우에도, 내가 장기간 이와 같은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의 악영향을 생각해 독립하는 것을 적극 권장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신경이 예민한건 고쳐야 할 병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런 박사는 다섯 명 중 한 명은 선천적으로 신경이 상당히 예민하다고 합니다 (Aron, 2013). 이런 사람에게는 혼자 살면서, 스스로 나에게 맞는 자극의 양을 조절할 수 있었다는 장점은 분명 있었습니다. 혼자 살면서 확실히 배운 건, 내가 과자극된 상태와 안정된 상태를 구분하는 것.
그러다가 그 적막함이 너무 버겁게 느껴져, 결국 지금의 짝궁을 만나 결혼해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행히도(?), 둘 다 신경이 예민한 편입니다. 저는 과자극이 된 상태에서는 귀가 갑자기 멍멍해지면서 남의 말소리가 잘 안 들리기 시작하고, 주변이 느닷없이 슬로우모션으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저도 말과 행동이 점차 느려집니다, 마치 주토피아의 나무늘보처럼요. 제 남편도 저와 비슷하게, 사람이 너무 북적대는 곳에 가면, 진이 빠지는게 눈에 보이며, 말수가 급격히 줄어듭니다.
반면 과자극된 상태에서 다시 안정 상태로 돌아오면, 우선 머리 속에 없던 공간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 듭니다. 몸의 긴장이 풀어지며, 부정적이고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가 점차 느려지고, 어느 순간 머리 속이 활짝 열리며 평온해 지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둘이 하루 이틀 열심히 놀거나 일하고 나서는, 반드시 회복하는 기간을 충분히 갖습니다. 처음 독립하면서 생각했던 나를 찾겠다는 거창한 생각은 결국, 아주 현실적으로, 나의 예산의 한계, 요리 실력의 한계, 그리고 신경계의 한계를 찾는 것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한계를 받아들이며, 그에 맞는 나만의 인생을 구축해 나가는 일이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제가 혼자이고 싶었던 이유와 혼자여서 실제로 좋았던 이유는 결국 아주 달랐습니다. 그냥 나답게 살고 싶다는 말은 이제 와서 보면 조금은 허망하게 느껴지기는 합니다. 우리는 결국 누군가한테 물들고 누군가를 물들이면서, 나의 가치관과 취향이 너의 가치관과 취향을 만나 화학 작용을 일으키도록 운명 지어진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연습 1. 지난 한주동안 하기 싫었는데 주변 사람에게 맞추어 주느라 억지로 한 일이 있었다면 한번 떠올려 보세요. 그때 그 행동을 하기로 마음 먹기 직전에 마음 속에서 어떤 걱정들이 떠올랐었는지 3가지만 나열해 보기.
연습 2.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기 전과 후에 나의 에너지 상태를 체크해보세요. 10점 만점에 몇 정도가 될지 가늠을 해보면서, 나에게서 에너지를 유난히 빼앗아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원인에 대해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기.
연습 3. 내가 그냥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10가지씩만 알아차려 보세요.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거나 원인을 분석하려 하지 마세요. 그리고 좋아하는 것 한 가지를 실천하고, 싫어하는 것 하나를 제거하거나 거절해보기.
참고.
Aron, E. N. (2013). The highly sensitive person: How to thrive when the world overwhelms you. Citadel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