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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리비 Apr 26. 2024

호랑이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에게는 위협에 대처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Van der Kolk, 2015). 첫째는 공격하기 (fight), 둘째는 도망치기 (flight), 셋째는 얼어버리듯 멈춰서기 (freeze)입니다. 실제로 동물들은 위협이 느껴질 때에는 이성의 개입 없이, 자동으로 위 세 가지 중 하나로 반응을 합니다. 필사적으로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가만히 숨죽이고 위협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이런 반사 반응은 원시 시대를 살아가던 우리 조상들에게는 아주 쓸모가 많았습니다. 길가다가 배고픈 호랑이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차분하게 앉아 상황을 따지다가다는 호랑이 밥이 되었을 테니까요. 일단 뇌의 화재 경보기인 편도체를 활성화시켜 지금은 비상 상황이라는 메시지가 온몸의 하부 체계에 순식간에 전달됩니다. 동시에 우리 뇌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가늠하여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대처법 중 가장 적절한 것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몸 속에서 일어난다니 정말 놀랍죠.


하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길 가다가 호랑이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사회가 핵가족화되어 가고 기술의 발달로 매순간 연결된 듯 하지만 이상하게 더욱 고립되어 가는 우리에게는, 관계 속에서의 위협이 호랑이만큼이나 무서운 위협으로 등장한 것 같습니다. 특히, 상당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거나 불안정한 애착 형성으로 인해 감정 조절이 서툰 사람에게는 하루 중 많은 것들이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누군가의 사소한 말 한 마디, 문자에 대한 늦은 답장, 찰나의 표정조차도 우리에게는 편도체의 알람을 울릴만한 위협처럼 느껴집니다.


우리 뇌의 방어 체계는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식으로 작용할까요. 싸우는 것 (fight)이 최선이라는 판단을 내린 뇌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사람은 바로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원시 시대 조상들의 뇌와 구조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현대인의 뇌의 입장에서 봤을 때, 나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한 사람을 당장 물어뜯어 죽인다면 상황은 일단 해결되긴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후의 사태 수습이 힘드니까, 이미 발생한 에너지를 품은 채, 뒷감당이 될만한 해소법을 찾습니다. 평소 알아두었던 약점을 꺼내어 한마디 쏘아 붙인다던지, 목청 높여 항의를 한다던지, 뒤에 가서 욕을 한다던지, 애꿎은 전봇대을 발로 찬다던지.  


도망치는 것 (flight)이 최선이라는 판단을 내린 뇌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지금 이 기분을 회피할 수 있는 방도를 필사적으로 찾습니다. 이 회피 반응은 원시 시대보다는 현대 사회에서 실현하기 더 수월합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대신, 우리는 지금의 불편한 감정을 가릴 수 있게 해주는 많은 도구를 이미 손에 쥐고 있으니까요. 대화를 계속하기 싫으면 문자에 답을 안 하면 그만이고, 지금 기분이 싫다면 쇼핑이나 음식이나 술이나 SNS를 활용해 더 강한 자극으로 이 기분을 가려버리면 됩니다.


얼어버리듯 멈춰서기 (freeze)전략을 선택한 뇌의 메시지를 전달 받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집니다. 사람도 보기가 싫고, 일도 하기가 싫습니다. 사소한 집안일이나 평소 쉽게 하던 작업도 몸과 머리가 천근만근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버겁게 느껴집니다. 아침에 눈뜨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도 너무, 너무 힘들게 느껴집니다. 지금 이 상황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위협이 지나갈 때까지 에너지라도도 절약하며 가만히 기다리라는 뇌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현대 사회의 호랑이들은 우리 뇌의 원시적인 기능을 여전히 작동시키지만, 우리에게는 이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았음에도 위협을 일시적으로 피했다는 가짜 안도감만을 안겨 주는 필살기들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나를 사랑하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는, 위협이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 편도체의 반사 반응에 그대로 순응하는 대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나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이 대신 들어서야 합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위협을 느낀 상태에서는 편도체가 활성화되고 전두엽의 활동이 억제되기 때문에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처 대신 알람을 끄는 정도의 임시방편식 대처만이 가능합니다. 위협을 임시로 밀어내기만 한 사람들은 하루의 끝에 가서 결국 그 불편감이 도로 몰려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들기 전까지의 시간이 견디기 힘든 사람이라면, 하루 동안 마주쳤던 '호랑이'들로부터 나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는 호랑이 대신 다른 위협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호랑이로부터 나를 적절히 지켜내려면, 내가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처법을 알아보고 실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안정된 상태로 다시 끌어내리는 연습이 필수입니다. 이런 노력이 우리 뇌가 보기에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어서, 썩 기분 좋은 과정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사 반응으로 인해 나의 내면이 더욱 불편해지지 않으려면, 이런 반사 반응의 근원을 정확히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상담 중에는 이런 위협에 대한 반사 반응을 줄이기 위해, 위협으로 인식했던 그 순간과 대상을 정확히 포착하고 명명하는 작업을 합니다. 언제, 어디,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 뇌 속 화재 경보기가 울려대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짚고 나면, 그 순간에 대한 나의 자동적인 의미 부여에 대해서도 의식적으로 점검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람이 답문을 늦게 한 것을 순간적으로 나에 대한 무시라고 해석했었구나, 라고 스스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알고 봤더니 그 시간 동안 이동 중이어서 문자를 늦게 봤던 것을 확인하고 나면, 상대방을 물어 뜯어 죽여야 할 필요가 상당히 줄어듭니다. 나는 무시당하지 않았고, 상대와의 관계는 여전히 견고하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면서 마음은 다시 안정을 찾습니다.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는 신경계가 적절히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편도체가 뇌 전체를 비상 태세로 돌린 상태가 아닌, 이성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전두엽를 포함한 뇌의 다양한 부위들이 통합적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이 유연하고 잔잔하고 힘 있게 흘러가는 그런 느낌입니다.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의 집중력의 퀄리티는 비상 체제 하에서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얼어버리려는 충동에 휩싸였을 때와는 그 질이 다릅니다. 이 상태를 알아보는 연습을 하고, 스스로 감정 조절을 잘 하는 사람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호랑이로부터 나를 가장 잘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연습 1. 지난 일주일간 화가 머리 끝까지 났었던 경험을 떠올려 보고, 그 상황에서 나의 반응은 편도체의 반사 반응이었는지,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의 적절한 대처였는지 되돌아보기.


연습 2. 지난 일주일간 강박적으로 했던 행동이 있었다면, 그 행동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고, 강박적 행동보다 더 적절한 대처법이 있었는지 판단해보기.


연습 3. 불편한 상황이 계속되어 머리와 몸이 마비되는 듯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고, 그 상황에서 나의 반응이 적절하고 의도된 반응이었는지, 아니면 뇌의 비상 태세에서 나온 반사 반응이었는지 되돌아보기.



참고.

Van der Kolk, B. (2015). The body keeps the score: Brain, mind, and body in the healing of trauma. Penguin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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