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가 위치한 북미 대륙 서부는 두 지각판이 만나는 지점으로 약 400-500년에 한번씩 강도 9.0이 넘는 대규모 지진 및 쓰나미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 지역 원주민들에게서 전래되는 내용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발생한 밴쿠버 지역 고강도 지진은 324년 전이었으므로, 요새 지질학자들이 하는 말이, 이제 슬슬 고강도 지진이 다시 또 발생할 때가 되었다고 하네요 (Lloyd, 2024). 밴쿠버 사람들 모두 한 순간에 대재앙을 맞아 죽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매일 일상을 영위해 나갑니다.
저는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입니다. 불안 증세가 있는 누군가가 저한테 지진 이야기를 하면, 그런 일 없을거라고 말을 못합니다. 고강도 지진 간에 시차가 대략 250에서 850년이라니, 이제 때가 되긴 된 것 같다고, 끄덕끄덕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밴쿠버에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디에서 살고 있든, 사람들은 수도 없는 위협을 매일 직면하며 삽니다. 누구든 당장 내일, 아니 15분 후에라도 사망할 가능성을 안고 살아간다는 건 사실이죠. 저의 고질적인 불안 중 하나는 길 가다 고층 건물에서 화분이 떨어져 맞아 죽는 겁니다. 우리 모두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에 떨며 살다가, 어느 날엔가는 실제로 죽어버리는 게 인생입니다.
저는 불안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믿습니다. 불안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미래를 내다보게 만들고, 계획도 하고 실천도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저의 상담 슈퍼바이저가 항상 하는 말이, "불안이 없는 우리 조상들은 원시 시대에 살아남지 못해서 다 죽었어.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모두 불안이 어느 정도는 있는 거야."
불안은 누구에게나 장착된 기본 옵션 중 하나입니다. 불안을 아예 뿌리 뽑아 없애는 건 불가능하지만, 내가 불안을 어떤 자세로 대할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비행기 여정에 비유하자면, 불안은 마치 비행기 타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는 비행기 승객과 같습니다. 비행기를 탔다가 사망할 확률은 실제로 0.000001% (즉, 110만명 중 한명)이라고 합니다. 확률이 극도로 낮긴 하지만, 0은 아니잖아요. 불안은 남들 다 밥 먹고 잠 자고 영화 볼 때 혼자, 우리 모두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거대한 진실을 마주하며 뜬눈으로 비행 시간을 견딥니다. 불안이라는 승객이 내 옆에 앉은 친구나 가족이라면, "아니야, 다 괜찮을거야, 걱정마"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죠. 논리적으로 따지면 틀린 말은 절대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불안에 떠는 승객을 어떻게 하면 안심시킬 수 있을까요? 근원적인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보호 장치가 몇 가지 있는데, 그 보호 장치를 강화하는게 불안을 잘 관리해 나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첫째는 자신감을 키우는 일입니다. 앞으로 발생할 확률이 극히 낮은 일에 대해 걱정을 하는 건 일종의 거짓 통제감입니다. 내가 걱정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느낌은, 달리 해석하면 내가 걱정함으로써 미래를 통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서 나옵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확실히 구분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에는 진심을 담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다 보면, 마음 속 불안의 볼륨이 점점 작아집니다. 내 통제하에 있는 것들만 챙기기에도 하루가 꽉 차거든요. 그리고 자꾸만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노력을 하다 보면, 실제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근력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마음이 안정되기도 합니다.
둘째는 타인과의 진정한 연결감입니다. 불안이 유난히 많은 사람들은 불안을 당장이라도 완화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한테 의지하는 과정에서, 의외로 얕은 연결감을 형성합니다. 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상대는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나의 불안을 일시적으로 잠재울 수단으로 주로 활용하다 보니 상대와의 깊은 교감은 점점 줄어듭니다. 불안정한 연결감에 뇌에서 인식하는 위협감은 높아지고, 자꾸만 불안해 집니다. 나는 주변 사람을 얼만큼, 댓가를 따지지 않고, 진심으로 대하고 있나요? 그들의 말에 진정으로 귀기울여 주고, 그들의 삶에 진심으로 기여하고 있나요?
셋째는 의미와 목표입니다. 우리가 당장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살아가는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영위해 나가는 겁니다.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가능케 해줄만한 삶의 의미나 목표가 있나요? 남들이 대단하게 봐줄만한 그런 목표가 아닌, 내가 하루하루, 조용히 몰입하며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기여할, 나만의 방식이 있나요. 이런 사람에게도 불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불안을 견뎌낼 만한 이유가 생깁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실존주의 심리 상담사 Yalom 박사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야말로 불안에 가장 근본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라고도 합니다 (Yalom, 1980).
불안이 장애가 되는 경우는, 비행기를 조종하던 조종사가 갑자기 일어나, 두려움에 덜덜 떠는 승객에게 "당신이 하는 말이 다 맞으니까, 앞으로 나와 직접 비행기 조종을 하시오"라며 비행기 조종을 맡길 때입니다. 조종사의 역할은 불안에 떠는 승객한테 휘둘리는 게 아닌, 위에서 말한 자신감, 유의미한 관계를 키워내고, 삶의 의미와 목표를 찾아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을 계속 해나가는 것입니다 (Schwartz, 2021). 인생이라는 비행기 여정에서 조종사의 역할을 잘 해내려면 일상 속에서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게 어떨까요.
연습 1. 나이 들어, 내가 죽기 직전의 순간을 상상해 보기. 내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으며,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가요?
연습 2. 내 불안이 하는 말에 가만히 귀기울여 보기. 그중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확실히 구분해서 적어보고, 통제할 수 있는 것들 중에 한 가지를 골라 오늘 하루 최선을 다 해보기.
참고.
Lloyd, M. (2024, June 11). B.C.'s next massive earthquake could be more dramatic than first thought. City News Everywhere. https://vancouver.citynews.ca/2024/06/11/bc-earthquake-research-bigger-than-first-thought/
Schwartz, R. C. (2021). No bad parts: Healing trauma and restoring wholeness with the Internal Family Systems model. Sounds True.
Yalom, I. D. (1980). Existential psychotherapy. Basic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