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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멈머리 Feb 21. 2023

결혼선언 냅다 질러버리기

나는 뭐가 그렇게 급했나


나의 브런치글을 처음부터 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도대체 왜 생각 없이 결혼이라는 중요한 안건을 그렇게 갑작스러운 자리에서 부모님께 통보식으로 말했는지' 의문이 들것이다. 왜냐면 나도 나 스스로가 의문이기 때문에. (머쓱) 사실 몇 달 전부터, 아니 사귀고 1년이 지나 결혼이라는 단어의 빈도수가 우리의 대화에서 점점 잦아지기 시작할 때 부모님께 말해야겠다 생각하긴 했다. 물론 생각만. 일단 처음부터 말하지 않은 이유는 부모님이 솔로인 딸과 남자친구가 있는 딸을 대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 나이 때의 대부분 어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으나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을 하는 순간 정말로 친구집에서 놀다 온다는 말도 다 의심을 받았다. 물론 정말로 친구집에서 놀던 안 놀던 뭐가 중요한지를 이해 못 했던 나는 아예 이런 일을 차단하고자 연애가 질린 20대 후반의 여성 코스프레를 하며 지내왔다.


아.. 얼마나 편했던지. 마음껏 외박을 하고 실컷 늦게 들어오고 여행도 다니면서 벌점 스티커를 차곡차곡 쌓은 걸까? 아직도 십 대 청소년을 막 벗어난 미성숙한 어른이라고 날 여기던 엄마아빠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한다고 하는 말에 당황스러움 받고 괘씸죄까지 더해져서 죄목만 가중되었다.


그렇다면 왜?? 냅다 결혼한다고 뜬금없는 타이밍에 질러버렸을까?


그것은 아마 내 마음속 불안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나는 회사일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혼준비랍시고 조금 한가한 부서로 파견을 신청해서 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유 있게 보내려고 했다. 그렇게 온 파견은 나에게 고과 스트레스를 주었다. 고과 시즌이 아니라서 어차피 평고과를 받겠거니 하며 온 파견이었는데 알고 보니 파견온 나를 제외하고 같이 입사한 같은 팀 동기들은 모두 상위고과를 받은 것이었다. 이 사실을 듣고 갑자기 너무나 뒤처진 느낌이 들어서 나의 진급시기를 계산해 보았다.


나는 석사로 입사해서 사실 진급까지 평균 6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중 3년이 지났고 나의 전략은 마지막 2년만 열심히 해서 진급하자가 목표였다. (상위고과 2개면 보통 진급함) 그래서 생각해 본 나의 플랜은 다음과 같다.


2023년 - 4년 차, 파견 와서 평고과

2024년 - 5년 차, 상위고과 받아야 함

2025년 - 6년 차, 진짜로 상위고과 받아야 함

   

실제로 2025년이 되면 30대 중반이 되는 나이라서 출산까지 계획하고 있던 난 도대체 언제 출산각을 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가 그러려면 결혼부터 빨리 해야겠네로 이어졌다.


결혼하고 1년 정도의 신혼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준비 잘해가면서 아이를 낳고 싶었지만 어쨌거나 분유값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므로 나의 회사 커리어도 잘 고려해주어야 하는데 그럼 당장 2023년에 결혼을 해서 24년에 아이를 가지던가 고과하나를 챙기고 가지던가 이런 생각에 마음이 엉망징창이었다.


또 한 가지는 같이 결혼을 생각하고 있던 친구 오미의 현실조언 때문이었다.


"야, 일단 식장부터 잡고 뭐든 생각해. 요즘도 식장 잡으려면 일 년 전부터 예약해야 해. 나는 그래서 여름에 하잖아.. (원래 계획은 겨울이었음)"


이런 말까지 들으니까 마음먹은 올해가 점점 줄고 있는 이 시간이 너무 속절없이 흘렀다. 그리고 이왕 결혼까지 마음먹은 거 빨리 허락받고 빨리 결혼하고 짠 해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래서 내 생일, 크리스마스, 연말, 연초, 계속 말씀드릴 타이밍을 잡았다. 하지만 너무 분위기가 좋아서 분위기를 깰까 봐, 맛있는 음식 먹는데 괜히 얹힐까 봐, 신나게 놀러 왔는데 흥이 깨져버릴까 봐, 2년 만에 남자친구 커밍아웃과 결혼선언이라는 깜짝 카드는 내 입술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렇게 슬슬 턱끝까지 말을 물고 있던 와중 부모님이 요즘 한창 티비에 틀면 나오는 연애프로그램을 보면서 나의 연애를 걱정하던 찰나, 뇌에서 컨트롤이 안된 단어들이 마구 튀어나갔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결혼선언을 냅다 질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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