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샌디에이고 Ep.3
샌디에이고 도착 후 사흘 동안 걸어서 가볼 만한 곳은 제법 많이 둘러봤기에, 대충한 과제지만 제출하고 난 뒤 상쾌한 기분으로 트래킹에 나섰다. 토리파인스 트래킹을 동네 마실 가듯 자주 한다는, 운전에 가이드까지 자처해 주신 지인의 친언니 덕을 톡톡히 봤다. 좀 더 멀리 주차하고 더 많이 걷지만 한화 3만 원에 육박할 듯한 주차비 미화 20달러를 내지 않아 더 신나는 기분으로 뜨거운 태양을 핑계 삼아 과감하게 끈나시에 테니스 스커트를 입고 등산화를 신은 채 해안길을 따라 이어지는 산길을 올라가다 보니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정상으로 향하는 중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도마뱀은 사진 한 장 남겨 보겠다고 핸드폰을 꺼내다 보면 벌써 사라지고 없고 지천으로 널린 선인장 사진만 실컷 찍었다. 노지의 선인장이 겨울 동안 별 탈 없이 살아남는 따뜻한 기후를 부러워하며 탁 트인 전망을 즐기던 중에 근처 등산객 한 무리가 바다 쪽을 보며 꺄악 소리 지르는 게 궁금해져서 가까이 가보니 이미 가고 없지만 상어 떼를 봤다고 근처 얕은 바닷가에 상어가 새끼들 공동육아하는 구역이 있다고 했다. 상어 지느러미 한쪽이라도 봤으면 하는 마음에 한참 바다를 실눈으로 째려보다가 해 지기 전에 서둘러서 내려와야 한다는 말에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산 위에서 보는 바다 일몰은 너무나 장관이었고 너무나도 순식간에 끝나 아쉬움을 남겼다..
토리파인스 자연보호 구역을 이틀에 걸쳐 트래킹 하며 일몰을 두 번이나 보는 호사를 누렸다. 집안에서 겨우 스트레칭에 애들 하굣길 정도만 가끔 왔다 갔다 했는데 매일 보는 풍경이 아니기에 어디서 힘이-솟는지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다리는 아프지만 에너지가 오히려 충전되는 느낌을 받았다. 등산로를 따라 바다가 보이는 기막힌 절경을 앞두고 절벽 앞에서 결혼식 하는 광경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웨딩드레스와 턱시도 차림에 등산화 조합은 제법 잘 어울렸다.
압도적이고 이질적인 지형에 어디로 눈을 돌려도 감탄이 나오는 풍경이지만 하루 종일 보다 보니 거기가 여기 같고 여기가 저기 같고 머릿속에는 따뜻한 물에 씻고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으로 꽉 찼다. 늦은 저녁 무렵 돌아온 숙소 밖 거리에서는 또 한 구역을 통째로 차량 진입을 막아 놓고 시끌벅적 주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밤마다 거리를 막아놓고 그렇게 파티를 해대는데 낮에 너무 돌아다녀 너덜너덜 저릿한 발바닥으론 도저히 끼어들 자신도 없고 또 내 얄팍한 지갑 사정도 살펴줘야 했다. 로맨스 한 스푼을 기대하는 청춘들의 젊은 열기 가득한 샌디에이고 밤 유흥거리 한복판, 알록달록 멕시코풍으로 멋스럽게 채색된 낡은 게스트하우스에 파티를 열망하는 파티원들이 죄다 빠져나가 한산해지고, 비어 있는 소파는 또다시 내 차지가 되었다.
그새 6인실에 한 명이 더 들어와 룸메이트가 늘었다. 게스트하우스 소파 위에서 샤워를 끝내고 피곤하지만 개운한 몸으로 길거리 파티가 끝나는 새벽 3시까지 최대한 알차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펼쳐든 '파리대왕' 하루 한 챕터 뽀개기 챌린지를 수행하던 중 건너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낯이 익은 룸메이트가 11시도 안 돼서 씻고 잘 준비를 하다니 서른 중반 넘은 늙은 여자처럼 뭐 하는 짓이냐고 말을 걸어왔다. 사실 자기는 이십 대는 아니고 삼십 대인데다 결혼도 한 번 했었다고 속눈썹을 항상 사수하는 게 전직 모델로서 미모관리 비법이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이야기를 술술 하기에 책은 잠시 덮고 그녀의 수다에 호응을 했다.
삼십 중반으로 보이다니 이런 영광이 어딨냐고 밥 사야 되냐고 몇 주 후 마흔일곱이라고 나이 커밍아웃을 하고 나니 이번엔 또 어디 출신인지 궁금해하기에 한국사람이라 밝혔더니 유럽인인 본인보다 왜 영어를 더 잘하냐고 웃으며 시비조이기에 그런 말 잘 못하면 인종차별주의자처럼 들릴 수 있다고 나도 웃으며 되받아주었다. 지구별 여행자들이 숱하게 모이는 게스트하우스 벙커침대 아래에 어울리지 않게 삐죽 튀어나온 하이힐 두 켤레가 의외였는데 그녀의 소지품이었다. 전남친과 전남편 험담을 하며 본인은 앞으로 연하남은 상종을 안 하겠다고 듬직하고 돈 잘 벌어오는 착한 연상남 찾는 중이라고 갑자기 몇십년 지기 절친모드로 급발진하는 그녀와 이 나이에 집에서 기다리는 남편과 아이들 두고선 이상형 남자 이야기나 하며 노닥거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분위기에 대충 맞장구 쳐주는 시들한 반응으로 살짜쿵 초를 치며 대화를 마무리하려니 평소 눈치 없기로 유명한 내 눈에도 그녀는 참 눈치가 없었다. 나보다 더 눈치 없는 사람이 세상엔 널려 있다는 생각에 좀 의기양양해졌다.
폴란드계 프랑스인이라는 프렌치 억양이 딱히 느껴지진 않는 눈에 띄는 외모의 그녀는 내가 며칠 후 LA로 간다니 거기 부랑자가 너무 많고 길거리에 분뇨냄새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니 다운타운은 딱히 안 가도 된다고 오지랖 섞인 조언을 해주었다. 여기 샌디에이고 다운타운도 만만치 않으니 딱히 걱정은 안 한다고 응수하고 '파리대왕' 하루에 한 챕터를 반드시 다 읽고 취침하는 게 구체적으로 미리 세운 유일한 여행 계획이라고 양해를 구하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 번이나 연착된 비행기 스케줄에 환승 시간까지 넉넉했기에 생각 보다 더 많이 읽어 버려 마음이 푸근해졌다. 게스트 하우스 리셉션 옆 바구니에 구비된 귀마개를 집어 왔지만 사용할 필요도 없이 피로에 절여져 눕자마자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며 눈뜨니 또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