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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여명 Mar 25. 2024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본 조르노, 아이와 함께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

아마도 25년 정도는 지난 이야기일 것이다. 바닥을 쓸고 다니는 힙합 바지(!)와 타이트한 티셔츠를 입은 어느 여자아이는 어딘가에 철푸덕 주저앉아 엄마, 아빠의 관광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이 뜨겁던 한 여름, 피사는 늘 그렇듯 관광객들로 북적였고, 그 분주함이 싫어 멀찍이 서서 피사의 사탑을 힐끔 바라보았을 뿐, 그게 전부였다. 그러네, 기울어졌네. 신기하다.


25년 후의 피사는, 그때보다 조금 선선했고, 이제 막 비가 그쳐 꽤나 신선한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여전히 북적였지만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피사의 사탑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엄마, 저거 기울어졌어요! 한 마디를 끝으로 배고프다, 덥다는 이유로 칭얼거리는 아이를 얼르고 달래 가며.


여행은, 때로 내 안에 숨겨진 용기를 발견하게 한다. 계획에서 무언가 틀어지는 것에 꽤나 예민한 편인데도, 여행 계획을 수정해 마음 닿는 데로 발길을 옮기는 일에는 꽤나 대범하다. 그래서였을까. 계획에 없던 피사의 사탑을 만나고 가는 그 짧은 시간에도, 우리는 전혀 분주하지 않았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난 일도, 앞으로 일어날 일도 아닌, 바로 지금이라는 걸, 각자의 여행을 통해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피사의 사탑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사탑 앞의 잔디광장을 뛰노는 쪽을 선택했다. 푸르른 잔디 위에 아이의 귀여운 목소리가 부서진다. 그래, 기억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닐지 몰라. 지금 이 순간을, 엄마, 아빠의 눈에 가득 담는다. 하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을 거란 걸 안다. 일 년, 아니 한 달도 되지 않아, 너는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거란 걸 안다. 아니, 삶이라는 알 수 없는 여정 앞에 조금 더 겸손해보자. 어느 날, 나에게,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불현듯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기억하지 못한대도 괜찮다.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숨을 쉬고, 바람을 따라 춤을 추고, 햇살 아래 가만히 앉아보는 이 순간. 작은 손을 잡고, 이제는 제법 묵직한 너를 안고 걸음을 옮기는 순간. 네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순간. 이 순간을 함께 했으니, 그거면 됐다. 순간이 우리의 행복이야.


피사의 사탑을 나오자마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딜 가도 변하지 않는 레시피로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식당에서 아이의 허기를 달래주자. 역시! 피사의사탑점 쯤 되는 맥도날드의 치즈버거 세트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기념품 마그넷을 고르던 엄마 옆에서 누누는 귀가 움직이는 핑크색 모자를 사고 싶다고 엄마, 아빠를 조른다. 여기까지 와서 이걸 사야겠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기분 좋게 허락한다. 네게는 엄마가 고른 마그넷이 더 쓸모없어 보일지도 모르잖아? 물론, 엄마껀 1유로였고, 네 (이상한) 모자는 10유로도 훨씬 넘긴 했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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