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살다가 일상에서 우연히 벌어지는 사소하지만 놀라운 일들을 겪고 나면 참 인생이란 뜻대로 되지도 않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 뜻하지도 않은 일들이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일어날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든다.
어쩌다 이런 나름 진지하고 철학적인 생각으로 빠져들었나 싶어 보면 정말 하찮다 싶을 만큼 대단한 이유와 예고도 없이 불쑥 이러한 생각들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오늘 같이 (여행 중에는 세탁을 할 수가 없으니) 웅이가 일하는 샵 근처 코인 세탁소를 찾아 밀린 세탁물을 가지고 뚜벅뚜벅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을 때처럼 말이다.
처음 가는 길이다 보니 핸드폰 속 지도를 봤다 고개를 잠깐 들어맞게 잘 가고 있는지 재차 길확인 하기를 반복하던 중이다. 어쩌다 횡단보도 신호에 걸려 앞을 보니 맞은편 도로에 나처럼 빨간 신호등에 걸린 대기 중인 차들이 행렬이 죽 보인다. 그런데 신기하다. 모두 빨간색이다. 바로 신호 앞에 선 첫 번째 차량부터 뒤쪽 연이어 다섯 대까지가 전부 같은 빨간색의 차이다. 종류는 다르나 같은 빨간색의 차량들이다. 빨간 립스틱의 여러 종류처럼 빨간색에도 그 명도나 채도에 따른 미세한 차이에 있지만 눈앞에 보이는 차량은 전부 같은 색의 빨간색이다.
별거 아니지만 이런 하루 말이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우연히 걸린 신호에 걸린 맞은편 차량들이 종류는 달라도 다섯 대가 연이어 전부 같은 색의 빨간색일 경우. ‘살면서 이런 경우의 수를 보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하며 나는 마저 코인 세탁소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리고 우연이 빚은 콘셉트 같은 이 빨간 차 행렬은 나에게 생각 촉진제가 되어 나는 밑도 끝도 없이 꼬리의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잠긴다. '내가 우리 엄마 딸로 태어날 확률은?', '내가 웅이를 만날 확률은?', '내가 미국에서 살게 될 확률은?' 이런 생각들을 끝도 없이 하다 보니 어느덧 세탁소에 다다른다. 그러다 갑자기 정말로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보고 싶어진 나는 밀리의 서재 어플을 켜서 ‘엄마’와 관련된 책을 찾아본다. 그리고 세탁물이 다 되길 기다리는 동안 책을 한 장 한 장 읽기 시작한다. 읽다 보니 엄마가 더 보고 싶어져 눈물이 글썽거려 괜스레 고개를 들어 눈물아 쏙 들어가라고 속으로 외쳐본다. 그런데 어머, 이건 또 무슨 우연이람? 옆에서 나처럼 세탁물을 기다리는 한 여성분도 종이책을 꺼내 놓고 조용히 읽고 계신다. 어쩌다 세탁소가 독서실로 변하는 기분을 맛보며 다시 눈길을 조용히 핸드폰 책 속으로 옮겨본다.
세탁물들은 세탁기 통 안에서 정신없이 물과 세제게 섞이느라 정신없지만 세탁기 밖 세상은 일정한 기계음이 반복적으로 흐를 뿐 나른하고 고요한 평범한 대낮의 일상이다. 노력으로 일궈진 필연적인 사건들이야 이성적으로 헤아릴 수야 있지만 이렇게 뜻하지 않게 벌어지는 일상에서의 우연들은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억 어딘가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특히나 장기 기억력이 뛰어나지 않은 나 같은 사람들에겐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오늘 일어난 희한한 우연들처럼 나도 우발적으로 글을 끄적여 본다. 신호등에 걸린 빨간 자동차의 나란한 행렬이 엄마 생각으로 이어진 특이한 날이니 말이다.